○ 탐방일 : 2013년 9월 18일
○ 소재지 :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산 3-2
○ 용진정사(湧珍精舍) 소개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1985년2월25일)로 지정된 사묘재실이다.
한말의 도학자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先 1851~1931)이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곳으로서 한말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은 원래 용진사가 있던 곳으로 삼봉 정도전, 우암 송시열등이 다녀갔던 곳으로 전해진다.
절이 허물어진 뒤 청안이씨들이 그 터를 소유하였으나, 후석이 정사를 짓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옛 절터의 상대와 중대를 희사함으로써
4칸의 정사를 지을 수 있었다. 후석이 별세한 뒤 문인들이 정사 동쪽에 3칸의 용진영당(湧珍影堂)을 세우고 1924년 석지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를 모셨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의 영정이 함께 걸려있다.
후석은 본관이 나주이며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오하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백부 향규에게 입양되었다.
8세 때부터 이웃에 사는 친척 오태규로부터 사서와 근사록을 배웠고, 이어 18세 때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송사 기우만, 식재 기재, 현와 고광선 등과 사귀었고, 전재 임헌회, 입재 송근수 등에게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의 학문 체계는 경학, 성리학, 예학, 의리론 등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1910년 일제는 명사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이라는 금품을 지급하여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자 헌병대로 끌고 가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끝내 받기를 거절하였다.
이후 1917년 용진산에 들어가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학을 가르치니, 문하생이 600여명에 이르렀다.
1919년 고종이 승하 하시자 문하생들과 용진정사 앞의 바위에서 통곡하였는데, 그뒤 이 바위를 읍궁암(泣弓岩)이라 불렀고,
"원수를 갚기 전에는 상복을 벗을 수 없다."하여 일생동안 백립을 쓰고 지냈다.
명정에 조선유민이라 쓰도록 유언하였다. 1934년에 그의 학문적 체계를 정리한 문집 25권 12책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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