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기행] 도선국사가 창건한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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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기행] 도선국사가 창건한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by 정산 돌구름 2010. 10. 3.
월출산 도갑사(道岬寺)...

 

탐방일 : 2010년 10월 2일

소재지 :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

도갑사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로 1984년2월29일 전남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말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도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의 어머니 최씨(崔氏)가 빨래를 하다가 물 위에 떠내려 오는 참외를 먹고 도선을 잉태하여 낳았으나 숲속에 버렸다.

  그런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그를 날개로 감싸고 먹이를 물어다 먹여 길렀으므로 최씨가 문수사 주지에게 맡겨 기르도록 하였으며,

  장성한 그가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세조2년(1456) 신미(信眉)와 수미(守眉)가 중건하여 전부 966칸에 달하는 당우가 들어섰으며, 부속암자로 상동암(上東庵)·하동암·

  남암(南庵)·서부도암(西浮屠庵)·동부도암·미륵암(彌勒庵)·비전암(碑殿庵)·봉선암(鳳仙庵)·대적암(大寂癌)·상견암(上見庵)·중견암·하견암

  등이 있었다. 최근에는 1977년 명부전과 해탈문을 제외한 전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1981년 대웅보전 복원을 시작으로 옛 전각에 대한

  복원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명부전(冥府殿)·미륵전(彌勒殿)·국사전(國師殿)·해탈문(解脫門)·일주문 및 요사인 세진당(洗塵堂)이 있다.

  이 중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도갑사해탈문은 1473년(성종 4)에 중건하였으며, 좌우에 금강역사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 미륵전에는 고려의 작품으로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보물 제1134호로 지정된 도갑사소장동자상이 있다.

  이밖에도 대웅보전 앞과 뒤에는 전남 유형문화재 제151호인 오층석탑 및 삼층석탑 등 고려시대의 석탑 2기와 전남 유형문화재 제38호

  로 지정된 도선·수미의 비가 있다. 이 중 도선·수미비는 비문에 의하면 1636년(인조 14)에 건립을 시작하여 1653년(효종 4)에 완성한 것

  으로, 조각의 솜씨와 비문의 필치가 섬세하고 우수하여 주목을 끈다.

  또한, 전남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된 수미왕사비, 전남 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된 석조(石槽)가 있다.

  주위에는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월출산마애여래좌상을 비롯하여, 도선이 디딜방아를 찧어 도술조화를 부렸다는 구정봉(九井峰)의

  9개 우물,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간 것을 슬퍼한 제자들이 왕인이 공부하던 동굴입구에 새겼다는 왕인박사상 등이 있다.

  절일원이 전남 문화재자료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정면과 측면 각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로 본래의 건물은 광해군 때 중수한 것이지만 1977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전각은 물론

그 안의 석가삼존과 금동의 육과(六光)보살도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1년에 원형을 복원된 것이다...

 

목조로 모신 아미타·석가·약사여래의 삼불상을 봉안했다.

석가모니는 현재불, 약사는 과거불, 아미타불은 미래불을 상징하며, 이 삼세불 신앙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뒤에는 삼불회도(三佛會圖)로 1폭에 삼존을 배치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1946년 조성의 칠성탱, 1981년 조성의 신중탱, 1989년 조성의 산신탱이 양 쪽 벽에 봉안되어 있다.

신중탱은 제석을 중심으로 무장한 신중들이 에워싸고 있는 구도가 일반적이다...

 

도갑사 오층석탑(五層石塔)

1987년6월1일 전남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6월13일 보물 제1433호로 승격되었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있는 고려초 작품으로 본래부터 지금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언제인가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다.

이 석탑은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갖추었고 상륜부(相輪部)에 노반(露盤)이 있고 꼭대기에는 보주(寶珠)를 얹었다.

탑의 기단부 지대석은 지하에 매몰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단층 기단인 듯하다.

기단 면석은 4개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귀기둥과 지주 1주씩을 모각(模刻)하였다. 2개의 판석으로 된 기단 갑석은 두꺼운 편이며,

밑면은 부연이 없이 수평으로 처리하였고, 윗면은 중앙에 오르면서 가벼운 경사를 이루고 1단의 원호(圓弧) 괴임대를 나타냈다.

1층 탑신은 4매 판석으로 꾸몄는데, 기단부에서처럼 박아 넣은 것이 아니라 엇물림으로 짰다.

탑신은 2층에서부터 급격히 높이를 줄였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서서히 체감되었다. 1층 옥개석은 전체적으로 매우 두꺼운 편이며,

낙수면의 물매도 급한 편이고 전각(轉角)도 약간 반전하고 있다. 옥개석의 밑면은 5단의 층급 받침을 갖추고 있으나 간격이 매우 좁다.

옥개석 상면 중앙에 역시 1단의 탑신괴임대를 갖추었다. 2층부터는 옥개석의 폭이 좁아지고 층급받침은 4층부터 점차 축소되고 있다.

탑의 조성 양식으로 보아 지역적 특색을 살린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탑으로 현재 높이는 460cm 이다....

 

대웅보전 뒤편의 전각인 천불전..

 

미륵전(彌勒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전각으로 안에는 보물 제8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도갑사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은1963년1월21일 보물 제8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의  불신(佛身)과 광배(光背)·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불상으로, 광배와 불신은 한 돌에 조각하였다.

머리는 나발(螺髮)로 비교적 큼직한 육계(肉髻)를 얹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두두룩한 눈두덩, 넓적한 코, 작은 입 등을 표현하였다.

이 얼굴에서 특징적인 것은 좁은 이마인데, 백호(白毫)를 새겨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두 귀는 짧은 편이고 군살 진 턱과 목의 삼도(三道)는 도식적인 느낌을 준다. 둥글고 넓은 어깨에 신체의 굴곡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신체적인 특징은 고려 초기작품인 개태사지석조불입상(보물 219호)이나 장곡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 174호) 등과 공통된다..

 

당당한 가슴에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불의(佛衣)를 입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에서 팔과 가슴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배 부분에

이르러서는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이러한 옷주름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부터 표현되어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통일신라 불상의 양식보다는 장식적이고 형식화되어, 이 작품이 그보다 후대의 작품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왼손은 무릎 위에 대고 있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무릎의 너비는 신체에 비하여 좁은 편이다.

광배는 주형 광배(舟形光背)로 머리 부분에는 단엽연화문(單葉蓮華文)을 새기고 그 주위에 화불(化佛) 2구를 조각하였다.

바깥 가장자리에는 화염문이 조각되었는데, 도식적인 수법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인 육감적이고 풍만하며 탄력 있는 양식이 사라지고 도식적이고 추상적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이 불상의 제작 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국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도선국사 진영과 수미왕사 진영을 봉안하고 있다...

 

 

도갑사 석조(石槽)는 1987년6월1일 전남유형문화재 제150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웅전 뜰 앞에 있다.

큰 돌의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쓰거나 곡물을 씻는 데 쓰는 돌그릇으로 300년 된 초대형의 고풍스런 석조는 화강암으로 만든

기다란 네모 모양통나무배 모양으로 네 귀의 모서리를 죽였으며 거죽의 밑바닥도 반원형으로 돌려 처리하였다.

승려들이 마실 물을 담아 두는 석조의 안쪽 밑바닥에는 물을 뺄 수 있는 작은 배수구가 있다.

‘강희(康熙) 21년 임술(壬戌)’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숙종8년(1682)에 제작된 석조임을 알 수 있다.

크기는 길이 467cm, 폭 116cm, 높이 85cm에 이르는 17세기 말의 거대한 석조이다..

 

명부전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보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수미대사의 중창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1년에 복원된 것이다..

 

산신각..

 

 

범종각은 벽체이 없이 6개의 기둥으로 우진각 지붕을 받치고 있다..

 

도갑사 부도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형태는 종형과 팔각원당형이 있는데 양식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절을 거쳐간

고승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전부 11기의 부도 가운데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것은 영백당(靈栢堂)과 서령당(西嶺堂) 부도뿐이다....

 

도선수미대사비.. 정확한 이름은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이며, 총 높이 513cm 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문에는 도갑사의 창건주 도선국사와 중창주 수미대사의 행장이 적혀 있다.

그리고 비 옆에는 구름을 뚫고 승천하는 용문양이 매우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1636년(인조 14)에 시작해서 1653년(효종 4)에 완성되었는데, 도선국사의 행정을 담고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비라는 점에서 중요하며,

광양 옥룡사에 국사의 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비분만이 전한다.

앞면의 비문 왼쪽의 글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지었으며, 글씨는 예조판서 오준(吳竣)이 썼고,

비문 오른쪽의 글은 홍문과부수찬 이수인(李壽仁)이 쓰고, 글씨는 성균관 진사 김시간(金時幹)이 썼다.

비석 뒷면의 음기는 대부분 도선국사에 관한 내용에 비중을 많이 두고 있다..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의 왕사로서 15세기 중엽에 도갑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영암 출신으로 13세 때 도갑사에서 출가하여 63세에 입적하였고 속리산 법주사에서 경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도갑사에 돌아와 절을 크게 중창하여, 세조는 그에게 묘각화상이라는 호를 내렸다..

 

도갑사 전경...

 

도갑사 해탈문(解脫門)1962년12월20일 국보 제50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옆면 2칸, 단층 맞배지붕주심포(柱心包) 형식이다.

석조기단(石造基壇) 위에 선 규모가 작은 문으로, 중앙 칸은 통로로 되어 있다.

원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을 안치하였다고 하나 없어지고, 뒷쪽 좌우 칸에 보물 제1134호인 2구의 목조동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구조는 약한 배흘림을 지닌 둥근 기둥 위에 이출목(二出目)의 공포(栱 包)를 올렸고, 그 위에 대들보를 올렸다.

이 문의 건축양식특이한 점은 공포가 구조적으로는 고출목 같으나 형태는 출목으로 보이고, 또 대들보나 마루보 위에서 마루도리나

대들보를 지탱하는 포대공의 양식이 기둥머리에 있는 공포와 전혀 달라 마치 다포집 양식의 공포와 같은 형태로 된 점이다.

따라서 이 건물은 주심포집 양식에서 가장 많이, 또  구체적으로 다포집 양식의 수법을 혼용한 가장 뚜렷한 유구(遺構)로서 흥미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드문 산문(山門) 건축으로 매우 중요하다..

 

해탈문을 나오면 거대한 비..

 

일주문의 안쪽은 국내제일선종대찰...

 

바깥쪽은 월출산도갑사 편액이 걸려있다...

 

입구의 보호수, 450년이 훨씬 넘은 팽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