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마니산(469.4m)-석모도 해명산(308m)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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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구름의 산행이야기/산행2007

강화도 마니산(469.4m)-석모도 해명산(308m) 산행

by 정산 돌구름 2007. 5. 6.

 

강화도 마니산(469.4m)-석모도 해명산(308m) 산행


○ 산행일자 : 2007. 5. 5 (토) - 금요일밤 23:10출발

○ 기상상황 : 흐린 후 맑음(아침에 짙은 안개로 조망 불량)

○ 산행인원 : 광주토요산악회(30명)

○ 산행개요

   문예회관(23:10) ~ 호남 ~ 경부 ~ 100번고속 ~ 김포IC ~ 48번도로 ~ 초지대교 ~ 상방리(03:30)

   상방리(03:40) ~ 참성단 ~ 마니산 ~ 함허정 ~ 함허동천(06:35) ~ 조식(06:50~07:15)

   함허동천(07:15) ~ 외포선착장(07:45) ~ 철선탑승(08:05~08:15) ~ 전득이고개(08:35)

   전득이고개(08:38) ~ 해명산 ~ 낙가산 ~ 보문사(11:20 ~ 12:00)

   보문사 주차장(12:20) ~ 전등사(14:00 ~ 14:40)

   전등사(14:40) ~ 100번고속 ~ 판교IC ~ 경부 ~ 호남 ~ 민자도로 ~ 호남 ~ 문예(20:50)

산행지 소개

<마니산>

민족 시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이 있고, 지금도 개천절에 제를 올리며, 전국체전의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한다.

'77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마니산은 500m도 안되지만, 해발 0m에서 시작되므로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교통이 편리하고 주위에 유적지가 많아 탐방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정상의 참성단(塹星檀, 468m)까지의 등산로가 계단길로 포장된 이후에는 노약자나 초심자들에게도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계단길은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오른쪽 능선따라 계단이 없는 단군로(길)가 있다. 이 등산로는 비교적 완만하다.

중간 정도와 참성단 바로 아래 다소 가파른 구간이 2군데 정도 있을 뿐이다.

마니산에는 고찰인 정수사 등이 있고 사계절을 통하여 변화무쌍하여 그윽하기로 저명할 뿐 아니라 가을철 강도팔경의 하나로 손꼽혀 자연경관이

기이하기로 이름나 있다.  참성단이나 정상에 서면 강하 명물 염전, 서해바다, 영종도 주변 섬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마니산은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유적지도 둘러 볼 수 있는 문화역사 산행지이기도 하다.

볼거리 : 참성단(사적 136호), 삼량성(사적 130호), 정수사(보물 161호), 참성단은 훼손방지를 위하여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석모도>

산과 바다의 정취를 함께 맛볼 수 있는 해명산은 인천시 삼산면 석모도 한가운데 있다.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듬뿍 받으며 산행을 할 수 있는 해명산은 산세가 아기자기해 가족동반 산행지로 적당하다.

석모도로 가는 카페리에 승용차를 싣고 갈 수 있지만 해명산과 낙가산을 잇는 능선종주를 하려면 승용차를 외포리에 주차시키고 석모도로 향하는

게 낫다. 석모도로 향하는 길목인 강화도 외포리 나루에서 카페리를 타고 갈매기떼 춤추는 뱃길을 10분정도 가면 석모도의 석포리 나루에 닿는다.

석포리 나루에 내려 버스를 타고 보문사로 향하다 해명산 산행 기점인 진드기고개에서 하차한다.

고개에서 서북쪽 능선을 타고 20분쯤 오르면 해명산 정상이다. 낙가산과 상봉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바다에는 섬들이 아른거린다.

정상을 떠나 주변 바다를 보면서 군데군데 피어있는 진달래 능선을 따라 낙가산으로 갈 때면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이 든다.

누에등처럼 길게 늘어선 낙가산 능선을 오르내리길 1시간, 갑자기 사방이 탁 트이면서 삼각점 표시가 있는 낙가산 정상이 나타난다.

정상에 서면 강화도 마니산과 매음리 염전, 주문도가 보인다.

능선에는 회백색 넓적바위인 천인대가 펼쳐져 있으며 서북쪽으로 이어진 능선 끝에는 상봉산이 우뚝 솟아있다.

낙가산에서 남서쪽으로 내려서면 눈썹바위로 향하게 된다. 눈썹바위에서 3백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보문사를 지나 주차장에 닿는다.

보문사 주차장에서 1㎞떨어진 바다 속에서는 시원하고 달콤하며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는 해암약수가 솟고 있다.

<전등사>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도 강화도는 역사와 문화의 섬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전등사와 전등사보다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손꼽힌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삼랑성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이었고, 삼국시대에는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었다. 당시 아도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진종사가 다시 역사의 기록에 등장한 것은 고려 고종 46년 때인 1259년이었다. 이때 고종은 삼랑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이보다 앞선 1232년, 고려 왕실에서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강화도로 임시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은 바 있다.

고려의 강화도 도읍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다.

그 기간 중 전등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은 풍수지리설과 더불어 임금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고려 때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 역시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결정체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대장경을 조성하기 위해 1245년, 선원사를 창건했는데 그 무렵에도 오랜 역사를 가졌던 진종사가 대장경 조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삼랑성 안에 가궐을 지은 후 진종사를 크게 중창시켰으며(1266년), 16년이 지1282년(충렬왕 8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라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 이때는 고려 왕실이 개경으로 환도한 뒤였고, 39년 동안 쓰였던

강화 궁궐터는 몽골군에 의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삼랑성 안의 전등사는 꾸준하게 사세를 유지해나갔다.

그만큼 고려 왕실이 전등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정족산의 산세가 안온한 명당이라는 것을 뜻한다.

풍수가들 역시 마니산이 할아버지산이라면 정족산은 할머니산으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복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

하지만 여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숙종 때인 1678년,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전등사는 왕실종찰로서 더욱 성장했다.

본래 왕실에서는 실록을 4부씩 만들어 궁궐 내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군데의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전주 사고만 무사했다. 이때 전주 사고본이 보존된 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주 사고본을 4부씩 옮겨 적게 하여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전등사로 옮겼고, 다른 실록은 봉화군 태백산, 영변 묘향산,

평창 오대산에 각각 보관하게 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각은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이때 왕실의 세보인 선원세보를 비롯해 왕실 문서를 보관하던 건물이 ‘선원각’이었다.

이후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전등사의 가장 어른 님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지위가 주어졌다. 도총섭은 조선시대 최고의 승직을 일컫는 말이다.

1726년에는 영조가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는가 하면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의 중수 불사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때 대조루도 함께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등사는 더욱 빈번하게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로 부각되었다.

조선말기로 접어들면서 전등사는 그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양헌수 장군 등을 임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경기·황해도 일대의 포수들, 전등사 사부대중들까지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조정에서는 전투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양헌수 장군 승전비와 비각을 정족산성 동문 내에 세웠다.

또한 지금도 전등사 대웅전 내부의 기둥과 벽화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낙서의 흔적이 남아있다.

병인양요 당시 부처님의 가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병사들의 염원이 그렇게 남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은 병인양요 후 전등사에 포량고를 건설하였고, 이듬해인 1872년에는 승군 50명과 총섭 1명을 두게 하여

전등사는 다시금 국난 극복의 호국 도량으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등사는 호국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창건 이래 나라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사들이 꾸준하게 찾는 수도권 최고(最古)의 기도 도량으로 손꼽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 무수한 문화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 산행후기

o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마니산과 보문사를 가려고 마음먹었다.

o 비가 온다고 했으나 오지 않아 밤 11시에 출발하는 광주토요산악회와 함께 하였다.

o 강화도에 도착하니 새벽 3시30분이 지났다.

o 어둠을 뚫고 산행을 시작하였으나 워낙 짙은 안개와 어둠에다 안개비가 내렸다.

o 해뜨는 시간이 5시35분이어서 정상에 맞추어 올랐으나 일출은커녕 안개 때문에 바로 앞을 볼 수조차 없었다. 정말 실망이다.

o 산에 오른 것으로 만족하고 함허동천에 도착하니 6시30분이었다.

o 아침식사를 하고 버스로 석모도로 향하였다.  강화도 외포항에서 석모도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o 버스를 철선에 싣고 내려 전득이고개에서 해명산과 낙가산, 그리고 보문사를 향하였다.

o 길은 험하지 않았으나 낙가산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길을 찾아 낙엽이 가득 쌓인 길을 따라 첫번째로 보문사에

  도착하였으나 약간 본래의 코스와는 달랐다.

o 보문사 입구에서 2,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올랐다가 내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뒤따라 왔다.

o 버스에서 맥주 몇잔을 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전등사로 향하였다.

  김포 애기봉에서 북한 구경을 하려고 하였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그냥 가기로 하였다.

o 김포를 거쳐 서울을 빠져 나오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o 오는 길에 공주~논산간 고속도로의 정안휴게소에서 뒷풀이를 하고 광주에 도착하니 9시가 조금 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