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대격전지 진주성과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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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최대격전지 진주성과 촉석루..

by 정산 돌구름 2024. 1. 14.

임진왜란 최대격전지 진주성과 촉석루..


2024년 1월 14일, 임진왜란 최대격전지 진주성과 촉석루.. 
차가운 날씨에 진주성으로 들어서 성곽을 잠시 둘러본다.

진주성은 진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찾는 대표명소로써 사적 제118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되었다.
촉석루는 2012년 CNN에서 선정한 ‘한국의 명소 50’ 안에 선정될 만큼 건축미와 풍경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추고 있다.
황량한 풍경이지만 촉석루에서 남강과 함께 내려다 보이는 경치도 아름답다.

진주성을 끝으로 6박7일의 경남여행을 마치고 순천 승주 진일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다음에는 어디로 떠날까?

 

백제시대 처음 축성된 진주성(晋州城)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인 진주대첩의 현장이자 임진왜란 최대격전지였으며, 그리고 호남을 지키는 방패이기도 하였다.

축성 당시에는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산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강변 절벽 위에 성채가 만들어졌고 서쪽으로는 하천이 있어 천혜의 요새였다.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면서 남해안에 출몰하여 분탕질하는 왜구를 방비하는 기지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1592년 4월 인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시민 장군이 성채를 보강하여 왜군의 공격을 대비하였다.

1592년 9월 왜군은 약 2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지만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하여 임란 3대첩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다.

1593년 6월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여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약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진주성은 호남으로 가는 길목으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을 잃게되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2차 전투에서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하여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왜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호남으로 쳐들어갈 여력을 상실하였다.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한 일화가 유명하다.
선조 38년(1605년)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였다.

그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618년(광해군 10년)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의 둘레는 약 1.7km이고, 외성의 둘레는 약 4km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1983년7월20일)로 지정된 촉석루(矗石樓)는 고려 말 진주성을 지키던 주장대(主將臺)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남강(南江)의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어 영남(嶺南)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진주성 남쪽 남강 석벽 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은 웅장한 위풍은 진주성의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고려 고종 28년(1241년)에 진주목사 김지대(金之岱)가 창건하여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으며, 1365년(공민왕 14년)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임진왜란 때 총지휘는 물론 남쪽 지휘대로 사용하여 ‘남장대(南將臺)’라고 하였으며, ‘장원루(壯元樓)’라고도 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향시(鄕試)를 치루는 고사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촉석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진양지(晉陽誌)』에 고려 때 김중선(金仲先) 등이 진주성 수축시 신축하였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김주(金湊)가 영남루(嶺南樓)를 중건할 때 촉석루를 본보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누기(樓記)』에는 조선 초 목사 권충(權衷)과 판관 박시결(朴時潔)이 중건하고 하륜(河崙)이 누기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725년(영조 1년) 목사 안극효(安克孝)에 의하여 마지막으로 중수되었다.

1593년7월29일 왜군의 파상적 공격에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영조 23년) 1월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렬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追憶往事 百有餘年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1년여 년이 지났네.

幸得南江 印篆宛然 다행히 남강에서 주웠던 도장에 새겨진 전자가 완연하니,

矗石閫義烈 想像愴先 촉석루에서의 뛰어난 의열 상상하니 먼저 서글퍼지네.

命留嶺閫 以竪忠焉 영남의 병영애 보관토록 하여 충절을 기리게 하노라.”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정조 15년)에 30살에 진주목사로 있는 부친께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다.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촉석루는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또 한번 소실되어 국보에서 해제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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