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700리 마지막 옛주막, 예천 삼강주막..
본문 바로가기
길따라 트레킹/역사, 문화, 그리고 여행

낙동강 700리 마지막 옛주막, 예천 삼강주막..

by 정산 돌구름 2022. 6. 15.

낙동강 700리 마지막 옛주막, 예천 삼강주막..


2022년 6월 11일, 우리나라 마지막 옛주막, 예천 삼강주막..

1900년 경에 지은 삼강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삼강나루의 나들이객에게 허기를 면하게 해주고 보부상들의 숙식처이며 시인묵객들의 유상처로 이용된 곳이다.

예천 회룡포를 지난 내성천이 금천과 낙동강이 만나 삼강을 이루고 그 옛날 사람들이 뗏목을 기다리며 찾았다는 삼강주막, 우리나라의 마지막 주막이라고 한다.

주막 건물 뒤에는 수령 약 500년 이상의 회화나무가 서 있어 옛 정취를 더해준다.

상주를 떠나 단양으로 가는 길에 잠시 낙동강 삼강주막에 머물다가 떠난다.

예천 제2경 삼강주막(三江酒幕)은 낙동강 700리의 마지막 남은 옛 주막이었다.

내성천, 금천, 낙동강 등 3강이 합하는 지점인 삼강에는 낙동강을 건너 서울로 가는 장삿배들과 문경새재를 오르는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

주막은 나루를 왕래하는 사람들과 보부상, 사공들에게 요기를 해주거나 숙식처를 제공하던 건물로 1900년 무렵 건축하였다.

이 주막은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한 집약적 평면구성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건축역사 자료로서 희소가치가 크고, 옛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어 2005년11월20일 경북 민속문화재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구한 역사와 함께 한 마지막 주모 유옥연 주모할머니가 지난 2006년 세상을 떠나면서 방치되고 있다가 2007년도에 1억 5천만 원의 예산으로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새로운 주모와 함께 나들이객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복원 당시 주막 주변에 보부상숙소, 사공숙소, 공동화장실 등을 함께 지었는데, 보부상숙소는 면적 40.41㎡로 방 2개와 대청, 부엌 등을 갖추고 있으며 사공숙소는 면적 21.60㎡로 방 2개를 들였다.

주막 건물 뒤에는 수령 약 500년 이상의 회화나무가 서 있어 옛 정취를 더해준다.

회화나무 아래의 들돌은 본래 체력을 단련하기 위하여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돌로 장성한 농촌 청년들이 농부로서의 역량을 인정 받는 의례에서 생겼다.

이곳에 있는 들돌은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물류의 이동이 늘어 인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자, 이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일꾼들의 품삯을 정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돌은 둥근 타원 모양이며 무게는 50Kg 정도 나간다.

삼강나루는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사이에 있는 나루로 조선시대에는 문경새재로 연결되는 주요 간선이었다.

조령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나룻배와 뱃사공이 존재하던 과거에는 오가는 길손들로 주막도 붐볐지만 지금은 홀로 남은 허름한 주막과 지명만이 과거를 말하고 있다.

삼강나루의 삼강은 세 강의 합류지점을 지칭하는 지명이며, 조선시대에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렀다.

『조선지도』(용궁)에 세 강이 만나는 곳에 무흘탄(無訖灘)이라고 적혀 있고, 『해동지도』(용궁)에는 삼강진선(三江津船)이라고 기재되어 그곳이 나루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각읍지도』(용궁) 등의 여러 군현지도에는 삼강진(三江津)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여지도서』에서는 "무흘탄(無訖灘)은 관아 남쪽 7리에 있다. 사천·성화천·수정탄 등의 물줄기가 용비산에서 합쳐져 삼강(三江)을 이룬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내성천, 금천, 낙동강의 세 물줄기가 삼강의 주류임을 시사하고 있다.

삼강주막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여행 1001’에 포함되어 있으며, 예천 2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