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순국성지, 제주 조천 평화통일 불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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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순국성지, 제주 조천 평화통일 불사리탑..

by 정산 돌구름 2021. 4. 11.

불교순국성지, 제주 조천 평화통일 불사리탑..


2021년 3월 24일(수), 제주 불교성지 조천 평화통일 불사리탑사를 찾아서..

제주 조천 평화통일 불사리탑은 세계평화와 조국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반구형으로 건립한 불교사원으로 1998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불사리탑은 높이 33m 3층 건물로, 33m는 천상세계 삼십삼천을 상징하고, 바닥의 면적은 360평으로 불법의 원융무애(圓融無礙)를 상징한다.

거대한 탑이 주위 풍경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평화통일 불사리탑사는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 맞서 불교중흥을 위해 헌신하다가 제주도로 유배와 순교한 허응당 보우대사와 환성 지안(志安)대사의 전법(傳法)정신을 잇고,

<법화경>의 사경(寫經) 공덕으로 조국통일과 세계평화를 이룰 것을 염원하며 세운 사찰이다.

당시 제주 고관사 주지로 있던 도림(道林)스님이 불사를 시작하여 1988년 음력 10월 10일 10시에 기공식을 가진 이후 10년 불사를 거쳐 1998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남방불교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불사리탑의 외양은 마치 인도 산치의 사리탑 같은 형태를 띠는데 이는 석가모니부처님 진신사리의 원력으로 세운 사찰임을 나타낸다.

불사리탑은 높이 33m의 3층 건물로 높이가 33m인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상세계 삼십삼천을 상징한다.

1층은 둥근 우주의 완전한 평화와 행복을 상징하기 위해 바닥을 원형으로 만들었으며, 면적도 원의 각도를 따라 360평으로 설계되었다.

또 1층의 기둥 32개는 관세음보살의 32응신을 나타낸다.

2층의 면적은 280평이며, 8개의 기둥은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하고, 천장은 법륜(法輪)으로 되어 있다.

3층의 면적은 108평인데 이는 108번뇌를 상징하며 모든 중생이 법당에서 번뇌를 벗고 부처님의 세계를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내부에는 법당을 비롯하여 약사전, 설법전, 선방, 사경실, 문화원 등의 공간이 있으며, 1층 법당에 약사여래불, 2층 법당에 석가모니불, 3층 법당에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건물을 빙 둘러 3층 난간이 설치되어 탑돌이를 할 수 있는데 이는 신라 황룡사 9층탑 탑돌이를 재현한 것이다.

꼭대기의 황금사리탑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

탑신을 장엄한 기와만불은 스님과 불자들이 4년여 동안 직접 조각하였다.

입구에 세운 일주문은 민족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의미로 백두산 천지를 향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경내에는 평화통일의 종, 관세음보살상, 불탑이 조성되어 있다.

평화통일불사리탑사는 법화경 사경 수행도량, 불교성지라는 특성을 지닌다.

창건 이후 해마다 광복절에 법화경 사경 봉안식을 거행하였으며, 2007년 현재 전국의 불자들이 손으로 베껴 쓴 사경이 약 20만 권, 사경을 보관하는 불탑이 50여 기에 이른다.

보우·환성 대사의 순교비와 석상을 세워 불교성지가 되고 있으며, 부설기관으로 보우사상연구소를 두고 있다.

보우(普雨 1515~1565)는 조선 명종 때의 승려로 호는 허응당(虛應堂) 또는 나암(懶庵)이다.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신임을 얻어 1548년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문정왕후 섭정 당시에는 봉은사를 선종(禪宗)의 본산으로, 봉선사를 교종(敎宗)의 본산으로 삼았다.

또한 승과를 부활시키고 도첩제를 실시하는 등 숭유억불정챗으로 탄압받던 불교 부흥에 앞장섰으며, 후에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올랐다.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는 유림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어 제주목사가 참하였다.

지안(志安 1664 ~ 1729)은 속성은 정(鄭), 자는 삼낙(三諾), 호는 환성(喚醒)으로 15세에 용문사(龍門寺)에서 승려가 되고 17세 때 정원(淨源)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금강산의 설제(雪齊)에게 참학(參學), 그 법을 이어받고, 1690년 직지사(直指寺)의 화엄법회(華嚴法會)에서 진언(震言)으로부터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후 여러 곳에서 강석(講席)을 베풀어 후학을 교도하였으며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조선 영조 1년(1725년) 금구(金溝) 금산사(金山寺)의 화엄대법회에서 학도 1,400명에게 설법(說法)했다.

1729년 법회의 일로 무고를 받아 지리산에서 잡혀 옥에 갇혔다가 곧 풀려났으나 다시 제주도에 유배, 도착한 지 7일 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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