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4일 남도여행 - 2. 완도 보길도&소안도, 구계등, 장보고동상, 청해진
남도로 떠난 3박4일 캠핑여행
○ 1일차(1월 25일) : 광주 - 영암 기찬묏길 - 해남 땅끝마을 희망공원
○ 2일차(1월 26일) : 땅끝 - 노화도 - 보길도 망끝전망대 - 낙서재&곡수재 - 송시열 글씐바위 - 예송리 - 노화 동천항
○ 3일차(1월 27일) : 노화 동천항 - 소안도 - 가학산 산행 -동천항 - 왕도 화흥포항 - 구계등 - 완도 해변공원
○ 4일차(1월 28일) : 완도 해변공원 - 장보고 동상- 청해진 유적 - 영암 더자반 - 광주
~^^~
2021년 1월 26일, 여행 2일차 아침, 땅끝항에서 노화도로 향하다.
어제 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아 늦은 시간 11시30분 배에 차를 싣고 30여분을 달려 노화도에 도착한다.
도선시간은 농협카페리가 1시간에 한번, 또 다른 선사에서 운영하는 배가 1시간에 한번, 즉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도선료는 1인 편도 6,500원, 차량은 18,000원이었다.
배가 커서 전진으로 들어가서 안에서 로터리처럼 돌아 나오므로 편리하다.
노화도 산양진항에 도착하여 노화읍에서 전복을 구입하여 보길도로 들어서 망끝전망대에 자리를 잡는다.
잠시 머무르다가 간간히 비가 내리는 흐린 날씨에 바람까지 거세어 낙조 풍경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떠난다.
최고의 낙조를 자랑하는 망끝 전망대는 보길도의 가장 서쪽인 보옥리 망월봉 끝자락의 돌출부에 자리한다.
전망대에 서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천길 단애가 펼쳐지고 끝없이 탁트인 시원한 바다와 함께 서해바다로 붉은 몸을 감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 망끝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추자도와 함께 갈도, 옥매도, 미역도, 상도 등 작은 섬들이 포개지듯 자리한 다도해의 경관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듯 하고, 섬과 함께하는 일몰은 한편의 서사시다.
망끝전망대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 포함된 아름다운 곳이다.
2021년 1월 26일, 윤선도의 유적이 있는 완도 보길도 낙서재와 곡수당을 찾았다.
동백꽃과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
낙서재(樂書齋)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보길도에 은거하면서 머물렀던 집으로 1671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집은 초가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복원되어 팔작지붕 기와로 지어져 있다. 남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자형 구조의 집에 사방으로 툇마루를 내어 주변환경을 쉽게 바라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마주보는 언덕에는 윤선도의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며 사색하는 공간으로 쓰였다는 동천석실이 있다. 2011년에는 『고산유고(孤山遺稿)』와 『보길도지(甫吉島識)』에 나오는 윤선도가 달(月)을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한 귀암(龜巖)으로 추정되는 돌이 낙서재 앞마당에 있다.
소은병은 낙서재터의 뒤에 있는 2.5m 높이의 병풍바위이다. 소은(小隱)은 세속을 싫어하여 은둔해 있다는 뜻이며 은병청풍(隱屛淸風)이라는 부용동팔경이 있다. 또 낙서재 앞뜰에 있었다는 바위가 귀암이다. 2.8m의 거북바위라고도 한다. 고산은 4령(봉황 기린 용 거북)이라고 하고 저녁이면 귀암에 앉아 보름달을 즐겼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이었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에 해박하고 의약·복서·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나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1587년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며,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612년(광해군 4년)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과 경상도 기장(機張)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42세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초시(初試)에 장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을 보도(輔導)했다. 1629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갔으나 청나라와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로 항해하다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서 은거하였다. 하지만 병자호란 당시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1638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해남으로 돌아갔다.
1652년(효종 3년) 왕명으로 복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때 남인(南人) 정개청(鄭介淸)의 서원(書院)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과 논쟁, 탄핵을 받고 삭직당했다. 1657년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복직되었다.
1659년 남인의 거두로서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가지고 송시열이 영수로 있는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하여 1660년 삼수(三水)에 유배당하였다.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벽지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복서(卜筮)·음양·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사후인 1675년(숙종 1년) 남인의 집권으로 신원(伸寃)되어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저서에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곡수당(曲水堂)은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른 물줄기가 이곳 인근에 이르러서 곡수를 이루고 있다. 1칸 짜리 집으로 사방에 퇴를 달고 반자를 두었다. 남쪽 난간에는 취적헌(取適軒), 서쪽은 익청헌(益淸軒)이라는 편액을 학관의 글씨로 새겼다. 주변에 일삼교(日三橋)와 유의교(有意橋)가 있다.
2021년 1월 26일, 보길도 여행, 우암 송시열 글쓴바위를 찾아서..
보길도의 동쪽 끝자락 백도리의 해안절벽에 윤선도와 동시대를 살아간 우암 송시열이 유배길에 들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싯구를 음각한 곳이다.
해안절벽과 어우러진 햇살, 바다 건너 소안도 경관은 너무도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글쓴바위는 보길도의 선도리 마을 앞 바닷가의 암벽을 말한다.
우암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 유배길에 올라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잠시 쉬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새기어 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여든세살 늙은 몸이 만경창파를 해치며 바다를 가는구나....’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시로 표현하여 바위에 새겨 놓았다.
조선 숙종이 후궁 장옥정 사이에 낳은 윤(昀)을 원자로 책봉하고 후궁 장씨를 희빈으로 삼겠다고 하자 송시열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되어 제주 귀양길에 오른다.
암각시문은 귀양가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표착하여 머물면서 자신의 처지를 시로 표현하여 바위에 새긴것이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북국공첨일 남명단신풍)
貂裘舊恩在 感激泣孤衷(초구구은재 감격읍고충)
2021년 1월 26일, 보길도를 둘러보고 노화도 동천항에 머물다.
해질녘 파란 하늘이 드러난 보길도 예송갯돌해변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보길도를 나와 노화도 동천항에 자리를 잡는다.
노화도 동천항은 완도 화흥포에서 노화도를 오가는 철부도선의 경유지이며, 바로 앞 소안도를 오가는 곳이다.
완도 전복의 80%를 차지하는 노화도, 씨알이 굵은 싱싱한 노화도 전복으로 한잔 술과 함께 하루의 피로를 달랜다.
고요한 노화 동천항의 밤, 오늘은 노화도와 구도를 연결하는 구도대교를 바라보며 여행 2일차를 마무리한다.
동천항에서 맞이하는 아침, 맑은 날씨에 동쪽하늘을 물들이는 아침 풍경도 아름답다.
보길도 예송리(禮松里)는 보길도 동남쪽의 바닷가 마을로 사계절 휴양지로 청환석이 폭 50m 길이 2km에 걸쳐 펼쳐져 있다. 1.4km의 길이로 활처럼 휘어진 갯돌해변과 상록수림이 있어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나무와 숲이 울창한 예송리 해변에는 갯돌이라 불리는 검푸른 빛깔의 조약돌이 깔려있어 파도가 드나들때마다 ‘자그르르, 쏴아 자그르르’하는 해조음을 들을 수 있다.
이 갯돌해변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완도팔경 중 하나에 꼽힐 만큼 아름답고 화려하다.
천연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된 예송리 상록수림은 원래 동남풍(주로 태풍)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애초에는 바닷가를 따라 1.5㎞의 길이로 늘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약 740m로 줄었다. 이 숲에서는 후박나무·붉가시나무·생달나무·감탕나무·동백나무 등과 같은 상록활엽수가 가장 흔하지만 상록침엽수인 곰솔(해송)과 낙엽활엽수인 팽나무·작살나무·누리장나무 등도 있다.
마을 뒤편에 있는 당숲의 면적은 크지 않지만 수백년 동안 주민들이 서낭신을 모시는 신성한 숲으로 보호해 온 덕택에 원시적인 자연상태는 바닷가의 상록수림보다 훨씬 더 낫고 보기도 좋다.
2021년 1월 27일 (수), 노화도 동천항에서 9시30분 배를 타고 10여분을 달려 소안도에 도착한다.
버스가 없어 콜택시를 불러타고 물치기미전망대로 이동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가학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져 오르내림이 비교적 완만하다.
능선을 따라 가학산 정상에 올랐다가 미라리로 내려서 소안면소재지를 거쳐 소안항으로 돌아와 산행을 마무리한다.
기나긴 산행에 힘들었지만 맑은 날씨에 남해바다와 다도해 풍경을 바라보며 걷는 기분좋은 산행길이었다.
항일의 섬 소안도(所安島)는 해남 이진과 소안 사이는 잔잔한 바다지만 제주와 소안 사이는 한없이 큰 바다로 평상시에도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은 공포에 시달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친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소안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이것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소안도(所安島)’는 인구는 3,000여 명도 채 안되는 작은 섬이지만 독립유공자 19명을 비롯해 모두 57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항일 운동의 섬’으로 불리는 소안도는 완도군의 최남단에 있고 완도항에서 17.8km 떨어져 있다.
동쪽으로 청산도를 접하고, 북쪽은 완도, 서쪽은 노화도와 보길도가 인접해 있고, 남쪽은 멀리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다.
완도에서 뱃길로 4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소안도는 노화도, 보길도, 횡간도, 당사도 등의 섬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룬다.
소안면은 4개의 유인도와 6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안도의 지형은 남쪽으로 길게 뻗은 장고형을 이루고 있다. 해남 이진-제주 사이 항해 때 이곳에서 해신제를 지냈다.
소안도는 ‘편안히 삶을 기댈 만한 섬’이란 뜻이다. 풍광이 뛰어나고 보길도와 마찬가지로 전복 양식장과 김 양식장이 많아 주민의 소득 수준이 높은 편이다.
2021년 1월 27, 소안도 가학산 산행을 마치고 동천항에서 완도 화흥포항으로 나온다.
16시20분 동천항을 출발하는 배로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화흥포항, 화흥포항에서 완도읍으로 가는 길에 정도리 구계등을 잠시 둘러본다.
활모양의 해안선을 따라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갈밭의 풍경이 정겹다.
명승 제3호(1972년7월26일), 완도 정도리 구계등(九階燈)은 완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4km에 위치한 남향의 궁형(弓形) 해안선으로 해안가는 자갈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활(弓)모양의 해안선을 따라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갈밭이 장관이다.
구계등이란 명칭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파도에 밀려 표면에 나타난 자갈밭이 9개의 계단을 이루어 구계등이라 불린 듯하다.
자갈밭은 약 800m에 걸쳐 이어져 있으며, 해안선이 자갈밭을 양쪽에서 감싸는 모양으로 수중절벽의 경관을 이루고 있다. 자갈밭의 너비는 83m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약 5m의 바닷물 속까지 연장되어 있다.
이곳의 자갈은 갯돌(靑丸石)로 크기는 밤자갈 정도이며,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큰 풍파가 있을 때마다 쓸려 돌밭의 전개양상이 때때로 달라지고, 대소 5개종의 천연석 청환석이 9계단을 이룬다.
또한, 자연적 연마에 의한 표면의 아름다움이 있는 동시에 양이 많아 양적 압도감을 주기도 한다.
해안선 등성이는 해송을 비롯하여 감탕나무, 가시나무 등 남부 특유의 상록수와 태산목·단풍나무 등이 해안선을 따라 안정감 있게 펼쳐져 남부지방 특유의 상록수가 우거져 조화를 이룬다. 특히, 이른 아침의 일출광경은 장관이다.
신라 흥덕왕 3년 해상왕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였을 때 주민들로부터 구계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궁중에서 이 지대를 녹원지로 봉하였다.
완도는 완도섬과 신지도·청산도·대모도·노화도·보길도·소안도 등 20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대부분 섬들이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어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기암절벽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가 어울려 해상국립공원의 면모를 보여준다.
2021년 1월 27일, 완도해변공원, 북적이던 예전과는 달리 조용한 분위기가 감돈다.
완도에서 근무하는 옛 동료 덕분에 해변공원 앞 횟집에서 푸짐한 회에 거나하게 한잔을 한다.
여행 3일차, 오늘밤은 갯내음 맡으며 여기에 머문다.
대한민국 청정바다 수도, 완도(莞島)는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큰 섬이다.
수려한 천혜의 자연과 청정 해역의 푸른 바다 위에 265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한반도의 남단에 모여 다도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완도는 섬으로만 형성된 완도군을 대표하는 연륙 도서이다.
완도군 원동과 달도가 완도교로 연륙된 지 40여 년이 지나 고속버스로 떠날 수 있지만 여전히 섬으로 인식되는 곳이기도 하다.
빙그레 웃을 ‘완(莞)’ 자와 섬 ‘도(島)’ 자를 쓰는 포근한 고장 완도는 하늘의 축복 속에 탄생된 땅이다. 동으로는 고흥군 거금도와 여수시 초도, 서로는 진도군 조도, 남으로는 대해인 제주도 추자도, 북으로는 해남군의 남창과 강진군, 장흥군을 마주하고 있다.
완도군 해조류센터(완도읍 해변공원로 84)는 13,756평의 대지에 지상 4층 연면적 426평으로 이중 전시면적은 220평이다.
주요시설은 2층 전시실(560㎡), 4층 홍보관(170㎡)이 있으며, 2015년 5월 1일 개관하였다.
무료로 개관되지만 지금은 코로나19로 굳게 문이 닫혀있다.
2021년 1월 28일, 맑지만 차가운 날씨의 아침이다.
완도해변공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장보고 동상에 이른다.
바다를 호령하듯 서있는 장보고 동상은 오른손의 칼은 무인을, 왼손의교역물품도록은 상인을 상징한 것이다.
바로 옆 어린이공원이 있어 가족단위로 나들이 하기에 좋은 곳이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진 장보고 동상의 풍경이 아름답다.
해상왕 장보고동상은 바다를 무대로 활약한 장보고대사의 해양 개척정신과 진취적인 기상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의 칼은 무인을, 왼손의 교역물품도록은 상인을 상징한 것으로 이는 군인이자 상인이였던 대사의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이다.
장보고는 완도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고 당나라로 건너가 30세의 나이로 무령군 군중소장이 되었으며, 산동성에 적산법화원을 세우고 중국각지에 형성된 신라방을 중심으로 경제공동체를 구성 자치영역을 확대하여 교포사회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권을 장악,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여 동아시아는 물론, 멀리 아랍상인과도 교역하는 등 한민족 최초의 세계인이자 해양상업제국을 건설한 국제적인 무역왕이였다.
아울러,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한 청해진의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한국, 중국, 일본과의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 무역활동은 물론, 정치문화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긴 세계적인 해양개척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다.
2021년 1월 28일, 3박4일 캠핑여행 마지막 코스는 완도 청해진 유적..
장보고대사가 설치한 해상무역의 거점 청해진은 해상대국 신라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찰랑대는 바다 위의 목교를 건너 장도 청해진 유적으로 들어선다.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잠시 둘러보고 세찬 바람과 차가운 날씨에 쫏기듯 떠난다.
귀향길에 영암맛집, 더자반에서 점심을 끝으로 3박4일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사적 제308호, 완도 청해진유적(淸海鎭遺蹟)..
청해진유적은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장도에 있는 신라 하대의 군진 유적으로 사적 제308호(1984년9월1일)로 지정되었다.
신라 후기 장보고가 서남해안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 산동지방과 일본을 연결한 해상교역로의 본거지로서 중요한 역사적유적이다.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년)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완도 앞바다 작은 섬인 장도(將島)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청해진은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보고(張保皐?∼846)는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장군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예로 삼는 것에 분개하여 신라로 돌아와 왕의 허락을 받고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을 누리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장보고는 이후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객인 염장에 의해 846년 암살 당하였고, 문성왕 13년(851년)에 청해진은 폐쇄되었으며, 장도는 섬 전체가 계단식 성의 흔적만 남게 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연차적인 발굴을 진행한 결과, 청해진유적 성(城)의 총 길이는 890m로 축성방법이 고대 판축기법에 의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섬 입구 방어용 목책으로 추정되는 원목렬은 총 길이 331m로 대부분 참나무 기둥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건물지 내에 지하 매납(埋納) 원형 구덩이 속에서 출토된 토기편병, 철제솥, 청동병 등은 인위적으로 매장한 것으로 대부분 제사용기로 판단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것들은 『삼국사기』의 “청해진 조음도에서 중사(中祀)를 거행하였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한편, 출토유물인 연화문 암·숫막새기와 토기편병, 해무리굽청자편 등과 섬 입구 원목렬 시료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한 분석 결과, 9세기 중반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로써 이 유적이 통일신라시대 장보고 대사가 활동한 9세기경에 축성·사용된 것이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이 성곽이 종래 내외 이중성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단일 성곽으로 축조되었음이 새로이 밝혀졌다.
다만 섬 입구쪽인 서남부부분에만 이중의 성벽을 둘러서 출입구를 보강하고 있다.
성벽은 1단 또는 2단의 돌을 폭 5∼6m 간격을 두고 평행으로 배열한 뒤 그 안쪽을 주변의 흙으로 겹겹히 다져 단단하게 쌓아올린 판축(版築)성벽이었다.
지금까지 최고 2.5m의 성벽이 최다 18겹의 판축으로 형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성벽 축조시 석렬(石列)과 나무기둥으로 작업구간을 나누었던 흔적이 14∼16m 간격으로 남아 있어 고대 성벽 축조기법을 밝혀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 관련시설로는 출입시설[門址] 1개소, 관측시설인 치(雉) 2개소, 고대(高臺)시설 1개소 등이 발견되었다.
성터 안에는 토기와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고, 인근에 장보고가 지었다는 법화사터가 남아있다.
청해진유적 입구에 위치한 장보고공원은 4,500여 평에 완도군의 201개 섬에서 채집된 기묘한 수석 200여 점이 상록활엽수와 어우러져 전시되어 있다.
공원 내에는 수석 이외에 장보고 기념관, 관광정보센터, 장보고대사 흉상, 와이즈맨기념탑, 소나무·동백나무 군락지, 잔디광장, 화장실 등 관광·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연중 수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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