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기행] 보물 제147호, 영남제일루 밀양 영남루(嶺南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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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기행] 보물 제147호, 영남제일루 밀양 영남루(嶺南樓)~

by 정산 돌구름 2020. 11. 2.

보물 제147호, 영남제일루 밀양 영남루(嶺南樓)~


2020년 10월 31일, 밀양 관아지를 보고 인근의 영남제일루로 불리는 영남루에 오른다.

주말을 맞아 민속공연을 펼치고 많은 인파가 북적거려 주말의 활기가 가득하다.

영남루 인근에는 천진궁, 무봉사, 작곡가 박시춘선생 옛집, 유정 사명대사동상 등이 자리한다.

 

보물 제147호(1963년1월21일)로 지정된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익공식(翼工式)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건물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건물이다.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시대로 그뒤 여러 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거듭하였다.

원래 그 자리에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이 있고 절의 종각으로 금벽루(金壁樓)라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고려시대에 절은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었던 것을 공민왕 14년(1365년) 누각을 새로 짓고 절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嶺南樓)라 하였다.

조선 세조 6년(1460년)에 중수하면서 규모를 크게 넓혔으며, 선조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37년(인조 15년) 다시 지었고 마지막으로 1844년(헌종 10년) 불에 탔던 것을 다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넓은 강을 옆에 낀 절벽 위에 남향으로 있다. 세부적으로 조선시대 말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는데, 출목(出目)을 갖춘 3익공식의 공포구성과 공포 주변에 새겨진 부재의 장식 수법에서 그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외부로 뻗은 쇠서(牛舌)에 연꽃 또는 연봉 장식이 첨가되고 판재화(板材化)된 3익공의 내부도 초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밖에 고주(高柱) 위에도 복잡한 장식이 중첩되며 용머리를 장식한 충량(衝樑)이 올라와 있다.

전체적으로 부재도 크고 기둥 간격도 넓으며 중층(重層)으로 되어 우리 나라 건축 중에서는 크고 우람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더욱이, 건물 서편에 작은 부속건물이 딸려 있고 지붕이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연결되어 독특한 외관을 구성한다.

빼어난 경관과 건축미가 조화를 이룬 건물의 하나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이 건물을 노래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이후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글과 글씨가 누각 내부에 가득하다. 시원스런 기둥 사이로 걸려 있는 편액은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로 당시 10세인 이증석의 글씨라 하니 어린 소년이 넘치는 힘으로 써내려간 모습이 대단하다.

영남루는 남아 있는 건물의 보존 상태로도 우리나라의 으뜸이다. 현재 영남루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누각 마루에 앉아 밀양강의 시원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영남루와 부속건물인 침류각은 월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층을 구분하여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월랑은 그 위에 지붕을 얹은 화려한 모습이다.

천진궁(天眞宮)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팔작지붕 목조와가로 1974년12월28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과거 객사건물의 일부로 지금은 단군 영정과 역대 여덟 왕조의 시조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15일 어천대제, 음력 10월3일 개천대제를 하고 있다.

영남루 경내에 있는 건물로 원래 이곳은 요선관이 있던 자리로 효종 3년(1652년)에 지었으며 공진관이라 부르기도 한다.

영조 15년(1739년)에 불탄 것을 영조 25년(1749년)에 다시 지었으며, 헌종 10년(1844년)에 크게 수리하였다.

1952년 단군봉안회가 생기면서 단군 및 삼국의 시조왕,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면서 대덕전이라 하였으나 1957년에 천진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남루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에 포함된 가볼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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