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산행길에 만난 문화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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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산행길에 만난 문화재들..

by 정산 돌구름 2020. 7. 20.

경주 남산 산행길에 만난 문화재들.. 


2020년 7월 16일, 경주 남산 산행길에 만난 문화재들..

사적 제219호(1971년4월28일) 경주 배리 삼릉(拜里三陵)

남산(南山)의 서쪽에 동서로 세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 불리고 있다.

서쪽으로부터 각각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능으로 전하고 있다.

아달라이사금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왕릉소재에 대한 기록이 없다.

아달라이사금의 원손(遠孫)인 신덕왕은 『삼국사기』에서는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화장해 잠현(箴峴)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또, 신덕왕의 태자로서 왕위를 이은 경명왕은 『삼국사기』에서는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황복사에서 화장해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덕왕릉이나 경명왕릉의 위치는 불분명한 상태이고, 게다가 신라 초기의 아달라이사금과 700여 년이나 시간적 간격이 있는 하대 신덕왕과 경명왕의 능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보기도 어려워서 이 삼릉이 앞의 세 왕의 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 고분 모두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규모와 비슷하나 아무런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고, 현재 놓여 있는 3개의 상석도 모두 최근에 만들어놓은 것이다.

전(傳) 신덕왕릉은 1935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친 도굴을 계기로 내부가 조사되었다.

내부구조는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서 평면은 사각형에 가깝고, 궁륭형(穹窿形) 천장으로 되어 있는 널방은 자연괴석(自然塊石)으로 축조되었다.

널방의 남벽 가운데는 널길이 달렸고 널방과 널길 사이는 판석(板石) 2매로 된 널문으로 막았다.

널방 각 벽면의 길이는 3.04∼3.09m이고, 널방 바닥에서 천장 뚜껑돌까지의 높이는 3.91m이다. 널길은 전체 길이 2.2m, 너비 1.2m이다.

널방 바닥 가운데에는 자연석으로 높이 35㎝의 방형축대를 쌓고 그 위에 두께 5㎝ 가량의 판석 2개를 남북으로 놓아 주검받침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 고분은 두 사람의 시신이 동서방향으로 봉안된 어울무덤[合葬墓]이라 할 수 있다. 널방과 널길의 모든 벽면과 천장 그리고 주검받침의 측면에는 석회를 두껍게 발랐다.

이 고분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북벽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연속해 마치 병풍을 돌려세운 것처럼 채색된 벽화가 있는 것이다.

입구에서 볼 때, 정면인 북쪽 벽면에 6폭, 그리고 그 좌우로 연속해 동서 벽면에 각각 3폭씩 모두 12폭으로 된 채색면이 있다.

높이는 1.4m이며 이를 다시 각 폭마다 상하로 양분해 모두 24면으로 구분하였다.

24면의 각 면에는 다른 문양이나 그림은 없이 주(朱)·황(黃)·백(白)·군청(群靑)·감청(紺靑) 등 5색으로 구별해 순서 없이 배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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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높이 1.6m, 너미 1.56m의 큰 불상으로 옆 계곡에 묻혀있다가 1964년 발견되어 옮겨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가슴에 매듭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전통매듭이 신라시대부터 장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와 두 무릎 수인이 파괴되어 어떠한 불상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나 편안히 앉은 자세, 탄력있는 가슴, 넓고 당당한 어깨 등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磨崖觀音菩薩像)..

경북 유형문화재 제19호(1972년12월29일)로 지정된 경주 남산 서쪽 사면의 삼릉계곡에 있는 큰 바위의 윗부분을 쪼아내어 부조한 관음보살상이다.

높이 1.5m로 전체 윤곽이 광배 형태로 마무리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들어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정병을 든 모습이다.

얼굴과 몸의 윗부분은 비교적 고부조로 입체감이 있게 표현되었으나, 허리 아래 부분은 윤곽이 불분명하고 표면이 거칠며, 왼쪽 다리 옆의 정병만 고부조로 표현되어 확실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머리에 보관(寶冠)의 표현은 없고, 육계(肉髻)처럼 솟아오른 민머리(素髮)이다.

입이 작고 입 끝을 살짝 오므려 미소짓고 있는 얼굴은 비교적 길고 통통하여 자비스러운 모습이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을 비스듬히 지나면서 넓게 도드라져 있다.

하체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가 허리에서 무릎 바로 위까지 늘어져 있고, 양 다리에 각각 U자형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선각(線刻)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천의가 입혀진 형식이나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정병을 들고 있는 손모습은 통일신라 8세기 관음보살상의 전형적인 표현인 경주의 굴불사지사면석불(掘佛寺址四面石佛) 중 서쪽면의 왼쪽 관음보살상이나 칠불암마애삼존불(七佛庵磨崖三尊佛) 중의 정병을 든 보살상 등과 유사하며, 불상의 비례와 착의법(着衣法), 그리고 지물(持物) 등 에서 8세기 후반경의 제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

경북유형문화재 제21호(1972년12월29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주 남산삼릉 계곡 입구에 있는 선각의 마애불상군이다.

불입상이 본존인 삼존상과 불좌상이 본존인 삼존상이 각각 다른 바위 면에 새겨져 있다.

좌측의 조금 돌출된 바위 면에 새겨진 불입상의 삼존불은 좌우의 두 보살이 무릎을 꿇고 꽃 쟁반을 받쳐 들어 꽃 공양을 하는 모습을 대담한 곡선의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삼존 모두 둥근 두광(頭光)이 있으며, 본존 불입상은 얼굴이 둥글고 신체도 풍만한 곡선으로 처리되었다. 상들이 머리와 몸체에 알맞은 비례감을 보여 준다.

편단 우견(偏袒右肩)의 착의법에 왼쪽 어깨를 넘어가는 대의(大衣)의 옷단이 삼각형으로 접혀 있다.

허리 밑에서 발 윗부분까지 U자형의 곡선을 그리며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올렸고 왼손은 배 앞으로 들어 양손을 마주하고 있다.

보살상은 가슴 앞에 세 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어깨를 감싸고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가는 천의(天衣) 자락이 몸 옆으로 큰 곡선을 그리며 유연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하체는 연결이 불분명한 부분도 있으나 밀착된 군의(裙衣)를 통하여 드러나는 신체를 표현한 듯, 다리의 윤곽이 간간이 새겨져 있다.

삼존상 모두 특징적인 부분을 포착하여 간략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오른쪽 뒤의 큰 바위 면에 선각된 불좌상 본존의 삼존상도 착의법이나 표현 기법이 거의 같으나 묘사력에서는 뒤떨어지는 편이다.

본존좌상보다 입상의 보살상들이 조금 작게 구성되었고, 삼존 모두 둥근 두광을 새겼으며 본존상에만 신광(身光)을 표시했다.

좌협시는 바위 면의 균열로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본존상은 우견 편단의 법의(法衣 : 중이 입는 가사나 장삼 따위의 옷)에 오른손을 앞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바닥을 위로 하여 배 앞에 들고 있다.

상체에 비해 무릎 폭이 좁고 하체의 표현은 치졸한 편이다. 보살상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왼손은 손끝을 밑으로 하여 배 앞에 대고 있다.

이 상들의 표현은 보살상의 착의법이나 목걸이 장식, 여래상의 소발(素髮)의 표현과 풍만한 신체 표현이 통일신라 초기의 경주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雁鴨池出土金銅三尊板佛)과 가깝게 보이며, 우견 편단의 착의법만 다르다.

따라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제작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꽃 공양의 보살상은 드물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보물 제666호(1980년6월11일)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석불이다.

불상 높이 142㎝, 대좌 높이 96.7㎝로 원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광배가 크게 파손되어 윗부분이 3분의 1 정도 결실된 상태로 불상 대좌 뒤쪽에 방치되어 있다.

그리고 불상의 얼굴 부분이 코 밑에서 턱까지 손상을 입어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뚜렷하다.

이 불상은 나발(螺髮)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어 있으며, 얼굴은 많이 손상되었지만 풍만하고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당당한 어깨에 걸친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는 몸에 얇게 밀착되어 간결하고 유려한 옷주름선을 형성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어 석가불로 추정되며,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는 당당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부처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느끼게 한다.

둥근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돌출선으로 구분된 주형(舟形)의 거신광배(擧身光背)는 안쪽에 연화문과 당초문을 새겼고 주위에는 화염문(火焰文)을 둘렀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유행한 팔각의 연화대좌로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대(上臺)에는 화려한 무늬의 연화가 조각되었으며, 중대(中臺)에는 간략하게 안상(眼象)이 조각되었다.

그러나 하대(下臺)에는 상·중대와는 달리 별다른 장식이 없는 단순한 팔각대석이다.

환조(丸彫)에 가까울 만큼 양감을 강조한 이 불상은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석조약사불좌상과 비슷하지만, 힘이 줄어든 옷주름 선, 섬세하고 미려한 장식적인 무늬의 광배와 대좌 등에서 그보다는 다소 연대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불상의 크기에 비하여 대좌가 낮아지고 광배가 커지기는 하였으나, 당당하고 안정된 자세 등으로 볼 때, 이 석불좌상은 8세기 후반∼9세기 초의 석불 양식을 충실히 따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 제114호 경주 약수계곡 마애입불상(磨崖立佛像)

경주  남산 약수계곡의 바위면에 높이가 8.6m나 되는 거대한 불상이 새겨져 있는데, 현재는 머리 부분이 없어지고 어깨 아래 부분만 남아 있다.

머리는 따로 만들어 붙인 듯 목부분에 머리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뚫려 있다.

바위면의 양 옆을 30㎝ 이상 파내어 불상이 매우 도드라지게 보이며, 손이나 옷주름 표현에서도 10㎝ 정도로 깊게 돋을새김하여 입체감이 뛰어나다.

왼손은 굽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내려서 허리 부분에 두었는데, 모두 엄지, 검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입으며, 옷자락이 어깨의 좌우로 길게 늘어져 여러 줄의 평행 주름을 만들고 있다.

가슴 부분에는 부드러운 U자형 주름이 무릎 가까이까지 촘촘하게 조각되었으며, 다시 그 아래로 치마와 같은 수직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신체를 감싼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어서 다소 단조롭고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선이 분명하여 힘이 있으면서도 유려하다.
이러한 옷주름은 월성 골굴암마애여래좌상(보물 제581호)이나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 등 9세기 후반의 불상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불상의 형태와 함께 제작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경주 경애왕릉(景哀王陵)

사적 제222호(1971년 4월 28일)로 지정된 통일신라 제55대 경애왕의 능이다.

경애왕의 성은 박씨(朴氏), 이름은 위응(魏膺)으로 아버지는 신라 제53대 신덕왕이며,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이다.

또한, 제54대왕 경명왕의 아우이다.

경애왕은 924년 왕위에 올라 927년 포석정에서 연회를 하다 후백제의 왕 견훤의 습격을 받고 붙잡혀 자살한 왕이다.

경주 서남산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에 있으며, 형태는 외형이 일반민묘와 같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별다른 특징은 없다.

지름 13.8m, 높이 4.2m로 일반민묘보다는 규모가 크나 신라왕릉으로는 빈약한 편이며 발굴된 적은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경애왕을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경애왕릉에서 남산쪽으로 2㎞ 정도 거리에 해목령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해목령의 서북쪽으로 200∼300m 거리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逸聖王陵, 사적 제173호)을 경애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