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스페인-포르투갈)반도로의 여행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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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유럽(스페인 포르투갈)

이베리아(스페인-포르투갈)반도로의 여행 9일..

by 정산 돌구름 2019. 4. 7.


이베리아(스페인-포르투갈)반도로의 여행 9..


 

여행기간 : 출발 2019329(), 도착 201946()

  <330() 인천공항 00:35 QR-859, 카타르 08:15 QR-149 / 45() 바르셀로나 16:40, 46일 카타르 02:00 QR-859>

여행지역 : 스페인(마드리드. 뜰레도, 세비야, 미하스, 론다, 몬세라트, 그라나다, 바르셀로나),

                   포르투갈(리스본, 파티마, 까보다로까)

여행사 및 여행인원 : 참좋은여행, 31(인솔자 조창휘)

여행경비 : 1,580,000<기본 1,190,000+ 390,000(300 EUR = 선택 210 EUR, 가이드 90 EUR) >

여행일정

  ○ 1일차(329, ) : 광주~인천국제공항

  ○ 2일차(330, ) : 인천국제공항~카타르 도하공항~스페인 마드리드공항~똘레도~마드리드

  ○ 3일차(331, ) : 마드리드(솔광장, 마요르광장, 프라도미술관)~포르투갈(파티마대성당)

  ○ 4일차(41, ) : 포르투갈(까보다로까, 리스본 로시우광장, 벨렘탑, 제로니모스 수녀원)~스페인 세비야

  ○ 5일차(42, ) : 세비야(세비야대성당, 마차투어, 황금의 탑, 스페인광장)~론다~미하스~그라나다(야경투어)

  ○ 6일차(43, ) : 그라나다(알함브라궁전, 헤네랄리페정원)~카스테욘

  ○ 7일차(44, ) : 카스테욘~몬세라트(케이블카, 수도원)~바르셀로나(몬주익언덕,카사밀라 저택, 구엘공원, 성가족성당)

  ○ 8일차(45, ) : 바르셀로나(람브라스 거리)~바르셀로나 공항~카타르 도하공항

  ○ 9일차(46, ) : 카타르 도하공항~인천공항~광주

이베리아반도(Iberian Peninsula)에 대한 이해

  유럽 제2의 큰 반도인 이베리아반도는 약 58면적에 너비 14의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과 마주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2개국이 분할해 있는데 대부분은 메세타(Meseta)’라 불리는 해발고도 600700m의 고지이다.

  메세타는 전체적으로 서쪽에 기울어져 많은 하천이 대서양으로 흐르고 있으며, 흐름이 빨라 교통로로 이용할 만한 곳이 적다.

  원주민은 이베르인이지만 그 후에 이주한 각 민족과의 혼혈로 오늘날의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이 형성되었다.

  알타미라 동굴이 발견됨으로써 구석기시대에 이미 크로마뇽인이 살던 토지였음이 밝혀졌으며, 그라나다 지방의 알메리아 문화

  등 거석문화(巨石文化)를 통하여 신석기시대에 관해서도 알려진 바가 많다.

  BC13세기경부터는 페니키아·그리스 등의 식민시가 곳곳에 만들어지고 주석과 구리가 지중해 무역의 대상이 되었다.

  올리브·포도 등의 과실도 반입되었으며, 또한 켈트인에 의한 목축도 확대되어 나갔다.

  BC 3세기의 포에니전쟁 후에 반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무역·경제의 필요성에 의해 코르도바·바르셀로나·타라고나

  등의 도시가 발달하였다.

  또 경지화에 의한 개발도 진행되었으나, 광산개발에 따른 산지와 산림의 황폐화도 심하였다.

  그후 5~8세기 게르만의 침입과 710년부터의 무어인의 내습이 있었다.

  특히 누어인은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 문명의 특색을 깊이 물들였으며, 지금도 그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관개농업과 살구·오렌지의 도입, 금속(무기 등피혁공업의 성립, 무역의 발전, 학문의 발달 등은 무어인의 큰 공적에 속한다.

  1492년에 마지막 거점이던 그라나다가 함락될 때까지는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를 제외한 전 이베리아가 그들의 세력하에

  있었으며 전성기에는 피레네산맥의 북쪽에 있던 프랑스까지도 그들의 세력 범위에 속해 있었다.

  그 동안 그리스도교도의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이 전개되었으며, 이슬람 세력의 쇠퇴와 함께 황폐도가 심했던 메세타에

  목양이 확대되어 나가고 메스타(牧羊者組合)제도가 발전하였다.

  한편 12세기에 이미 독립국 형태를 이루고 있던 포르투갈은 1580년부터 에스파냐의 속령이 되었으며, 1640년에 독립을 회복한

  후로는 이들 양국이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다.

  메스타 제도는 대토지 소유 제도로 변모하였으며, 봉건제도에서 영세농민과의 사이에 현저한 빈부의 격차를 낳게 하였다.

  이는 17세기를 중심으로 한 에스파냐·포르투갈의 해외 발전 시기를 맞이하자 식민제국 치하에서 더욱 내정을 소홀히 다스리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그후의 에스파냐내란과 오늘날 양국의 쇠퇴와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메세타의 중앙을 동서방향으로 뻗쳐 있는 과다라마산맥은 몇몇 산지가 모인 것으로 그 북쪽은 카스티야라비에하(구 카스티야)

  이고, 남쪽은 카스티야라누에바(신 카스티야)이다. 양쪽이 모두 연간 강수량이 300500밖에 되지 않는 건조한 지역이며,

  조방적인 목양이 행해진다. 돈키호테의 무대인 신카스티야 동부의 라만차는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은 중앙부의 아네토산이 최고봉이며, 그 동쪽에 조그만 독립국 안도라가 있다.

  피레네산맥 서쪽에 이어져 있는 산지는 칸타브리아산맥으로 대서양 연안에 임하는 곳은 많은 후미를 이루고 있는데, 이 후미를

  리아라고 부르는 데서 리아스식해안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들 산지 및 북서안에는 연간 1,000이상의 강우가 있으며, 서유럽 및 알프스와 비슷한 식생이 전개되고 임업이 성하다.

  피레네와 메세타 사이는 아라곤 저지이고, 메세타와 남쪽의 시에라네바다산맥 사이는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방이다.

  양쪽 모두 개발의 역사가 오래되며, 특히 안달루시아는 이슬람풍의 특색이 진하게 남아 있다.

  시에라네바다의 서쪽 끝은 지브롤터(Gibraltar)이며, 그 대안(對岸)에는 세우타(Ceuta)가 있다.

  자연조건과 역사를 반영하여 이베리아 반도는 대체로 1차산업에 치우쳐 있으며 공업 등의 개발은 뒤떨어진 편이다.

  과수·곡물 재배가 농업의 중심이지만, 지중해 연안 등지에는 벼농사 지대가 있다.

  대서양 연안에서는 어업과 제염(製鹽)도 행해지고 있으나 생산량은 그리 많지 않다.

  또 예로부터 유명한 광물자원도 철광석과 수은을 제외하고는 채굴량이 많지 않다.

 

 

스페인(Spain)

  유럽대륙의 서쪽 끝인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의 정식명칭은 '에스타도 에스파뇰'(Estado Espanol)이다.

  영어명은 '스페인왕국'(Kingdom of Spain)이며, 수도는 마드리드(Madrld)이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이며, 면적은 5,0596,400(세계492015 국토교통부, FAO 기준), 인구는 4,6441,049(세계30,

  2019 통 계청, UN, 대만통계청 기준), GDP13,1132,0015,516달러(세계14, 2017 한국은행대만통계청 기준), 기후는

  여름에 건조가 심한 지중해성 기후이고, 종교는 로마가톨릭 94%가 이상이다.

 [지리적요건]

  서쪽으로 포르투갈, 북쪽으로 프랑스에 접하고, 남쪽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의 모로코와 마주한다.

  동쪽으로 지중해, 북쪽으로 비스케이만(), 북서쪽으로 대서양에 면한다.

  국토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레아레스 제도(諸島), 카나리아 제도에 흩어져 있다.

  모로코 북부에도 스페인령()인 세우타(Ceuta), 멜리야(Melilla) 및 모로코 해안으로부터 떨어진 3개의 작은 섬인 차파리나스

  (Chafarinas), 페논데알우세마스(Penon de Alhucemas), 페논데벨레스델라고메라(Penon de Velez de la Gomera)가 있다.

  행정구역은 17개주(comunidad autonoma), 2개 해외 자치시(ciudad autonoma)인 세우타, 멜리야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

  스페인은 좁은 연안 저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메세타(Meseta 고원)라고 불리는 대지로 이루어져 있다.

  메세타는 서쪽으로 기울어진 대지이기 때문에 두에로강·타호강·과달키비르강 등 주요 하천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이 많다.

  예외적으로 비스케이만에 인접한 칸타브리아산맥에서 발원한 에브로강은 피레네산맥 남쪽 기슭 아라곤 저지를 남동방향으로

  흘러 하구에 커다란 삼각주를 만든다.

  프랑스와의 국경을 이루는 피레네산맥은 해발 3,000m를 넘는 험준한 산지이며, 비스케이만(Bay of Biscay)을 따라 동서로 뻗어

  있는 칸타브리아(Cordillera Cantabria)산맥은 그보다 낮아 해발고도는 2,000m 전후이다.

  메세타 남쪽 가장자리에는 시에라모레나(Sierra Morena)와 시에라네바다(Sierra Nevada) 두산맥이 각각 동서로 나란히 달린다.

  기후는 대체로 여름에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이지만 국지적으로는 대서양의 영향을 받는 곳도 있다.

  북서부와 칸타브리아산맥, 피레네산맥일대에서는 비교적 비가 많아 연간 강수량이 1,500mm를 넘는 곳도 있지만, 레온 지방과

  지중해 쪽의 무르시아 지방은 강수량이 적어 연간 400mm 이하이다.

  내륙지방도 강수량이 적은데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심하여 국지적으로는 스텝 또는 사막과 같은 경관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 북동부의 카탈루나 지방은 이탈리아, 프랑스의 리비에라 지방의 기후와 비슷하며 해안은 겨울에도 비교적 온난하다.

  건조한 기후조건 때문에 일반적으로 민둥산과 척박한 다갈색 토양이 주를 이루며 북부의 산지에서만 삼림을 볼 수 있다.

  전국토 중 경지는 11%, 초원은 18%, 산림지대는 56%이다.

 [역사]

  이베리아반도에서 구석기시대 최고(最古)의 인종은 크로마뇽인으로 그들의 문화인 동굴회화(洞窟繪畵)가 많이 남아 있다.

  산탄데르(Santander)의 서쪽에 있는 대표적인 알타미라 동굴회화는 BC15,000년 경의 것이며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회화와 함께

  유명하다. 신석기시대는 적어도 BC 3,000년대에 시작되었다.

  신석기문화 인종은 분명치 않으나 BC 3,000년대 아프리카로부터 이주하여 동부·남동부에 정착한 이베리아족이라는 설이 있다.

  BC 2,000년 경에는 안달루시아에 타르테수스족이 이룩했다고 하는 동기문화(銅器文化)가 출현하였으며, 훗날 청동기 제조도

  이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BC 1000년경부터 수세기에 걸쳐 철기문화를 가진 켈트족이 프랑스로부터 이주해 와서 이베리아족과

  혼혈하였으며, 갈색 피부, 검은 머리칼을 특징으로 하는 켈트이베리아족이 형성되어 스페인 민족의 중핵이 되었다.

  기원전 10세기 경에는 고대 페니키아인이 카디스(cadiz)를 건설하고, 기원전 6세기에는 그리스인이 동부 해안에 식민시인

  암뿌리아스(Ampurias)를 건설하여 각각 교역활동을 하였다.

  카르타고 세력도 BC 6세기에 진출하여 바르키노(바르셀로나:Barcelona), 카르타고노바(커르타헤나 Cartagena)를 건설하고

  교역을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에는 교역보다는 무력으로 타호강(Tajo river) 이남을 제압하였으며 그로 인해 아프리카

  북해안을 비롯한 지중해에서 세력을 떨치고 로마 공화국의 해상활동과 대립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BC 219년 로마의 동맹시(同盟市) 사군툼(현재의 지명은 사쿤토, 발렌시아지방) 한니발이 거느리는 카르타고군()

  공격을 받아, 지중해 무역권을 다투는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BC 201)에 휘말리게 되었다.

  로마는 소()스키피오의 지휘하에 BC 209년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 스페인의 새 지배자가 되었으며, 로마의 지배와 수탈

  그리고 도시 생활의 도입에 따라 부족국가의 오랜 정치·사회 제도는 해체되고 말았다.

  언어도 공용어는 이베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바뀌어 오늘날 사용하는 스페인어의 근간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성()바울로와

  그 제자들이 그리스도교를 포교하였고,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2,3세기에는 신도들의 조직체를 만들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스페인에도 영향을 미쳤다.

  409년의 제1차 침입에 이어 414년에 침입한 서(西)고트족은 5세기 중엽에 이르러 에우리크(Eurico)의 지휘 아래 로마군과 먼저

  온 게르만족들을 격파하여 서고트 왕국을 확립, 6세기 아타나길드(Athanagild)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스페인 지역의 서고트 왕국은 서유럽 봉건제도의 확립을 위한 과도기에 종교·왕위계승 문제와 관련한 혼란을 극복하지 못한 채

  711년 이슬람 옴미아드 왕조의 침입으로 붕괴하였다.

  이슬람세력은 피레네를 넘어 프랑크 왕국도 노렸으나 732년 푸아티에(Poitiers)싸움에서 패배하여 이베리아반도로 물러났으며,

  그 이후 8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다.

  이슬람 지배 동안 산업은 발전되었으며 농업에서는 관개시설이 건설되고 목화·복숭아·사탕수수 등의 새 작물이 재배되었다.

  수공업은 톨레도(Toledo)·그라나다(Granada)·알메리아(Almeria)·코르도바(Cordoba)에서 발달하였고 코르도바·세비야는 시장·

  수출항으로서 번창하였다.

  이슬람 문화·기술 수준이 당시 서유럽을 능가하였다는 것은 이미 10세기에 코르도바 도서관의 소장서적이 60만 권에 이르고,

  그리스철학 연구도 상당수준이었으며 11세기에 제지 생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또한 이슬람 정복의 수평적성격을 스페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납·부역·인두세를 거두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이슬람군() 조직유지가 피정복지에 행하여젔을 뿐 피정복민족 고유의 사회·

  정치·종교 체계에 대한 강제적 파괴와 재편은 행해지지 않았다.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교도로부터 배교자(背敎者)라 불렸으나 자유민의 신분을 얻고 조세도 경감되었기 때문에

  서고트 시대의 노예들이 많이 개종하였다. 그리스도교도는 모사라베스(Mozarabes)라 불렸으며, 공조(貢租) 등의 부담을 교환

  조건으로 하여 종전까지의 토지지배권, 교회의 유지, 서고트 관습법으로 운영되는 특별자치구의 형성을 승인받았다.

  스페인의 중세는 이슬람으로부터 실지회복(失地回復)을 꾀하는 그리스도교도의 운동, 즉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으로 비롯

  되었기 때문에 서유럽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북부산지를 어선으로 하여 이슬람 지배를 모면했던 아스투리아스(Asturias)·나바라(Navarra) 두 지방의 서고트 귀족은 8세기에

  들어와 남하(南下)를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른, 회복운동이 진전을 보임에 따라 각지에 작은 왕국이 형성되었다.

  이 운동은 단순히 군사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지역의 확대가 아닌 탈환지역에서의 그리스도교도의 정착·경영을 목적으로 한 것

  이었으며, 이것 없이는 정복군의 전진기지 유지도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국왕과 귀족은 레온(Leon)지방과 카스티야(Castilla)지방을 중심으로 농민에게 이민특허장(cartas pueblas)의 교부와

  베에트리아스(behetrias)의 승인이라는 유리한 조건을 내걸고 위험부담이 큰 전선지대로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이민 특허장에 따라 농민은 토지 개간의 특권을 얻게 되었으며 영주의 자의적 부담도 피할 수 있었다. 베에트리아스는 도시에

  주어진 특권으로 영주의 자유선택권을 내용으로 했기 때문에 영주의 무제한적 지배를 저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과 귀족의 관계도 서유럽 국가들과 같지 않았으며, 귀족이 정복하여 획득한 토지는 봉토가 아닌 군역의 보수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신하가 국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해도 토지는 몰수되지 않았다. 이처럼 불완전한 장원제도(莊園制)와 레엔 제도(봉토를

  매개로 한 주종관계)가 스페인을 출발점으로 한 것은 중세의 특징이다.

  또한 국토회복운동은 종교 전쟁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슬람의 종교적·문화적 유산을 극복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열광적 신앙이 육성되고 교회의 영향력이 비대해진 점도 주목할 만하다.

  14세기 후반 스페인은 국토회복운동을 통해 강대해진 카스티야(Castilla) 왕국과 아라곤(Aragon) 왕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1479년 아라곤 페르난도 2(Fernando II)가 카스티야여왕 이사벨(Isabel)을 아내로 맞이함에 따라 스페인 통일이 이루어졌다.

  가톨릭 신자인 이들 두 왕이 1492년 스페인에 남아 있는 이슬람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를 점령, 국토회복운동이 종료되어

  스페인은 절대주의시대에 접어들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에서는 이미 13세기부터 국왕이 반항적인 귀족에 대처하기 위해 귀족과 대립하는 사람 및 왕실재정 지지자를

  도시대표로 만들었고, 코르테스(Cortes)라는 신분제 의회를 만들어 통치기관으로 삼고 있었다.

  왕권의 도시대표와의 제휴 정책을 계승한 이들 두 왕은 신성도시동맹(神聖都市同盟 : Santa Hermandad)을 결성하였다.

  동맹 도시에 재판권과 경찰권을 줌으로써 도시는 귀족을 대신하여 국왕의 군사력·경찰력의 중핵이 되었고 왕권에 충실한 시민

  출신의 새 귀족층을 낳는 기반이 되었다. 두 왕은 또한 성채 파괴 등의 귀족억압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귀족을 부재지주화·궁정

  귀족화시키기 위하여 군인·관료로 임명하고 군사제도와 관료통치기구를 정비하였다.

  따라서 15세기 말에 왕권은 강화되고 코르테스는 무력화하여 절대주의에의 길이 굳어졌다.

  한편 이사벨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으로 스페인은 남북 아메리카의 정복과 식민지 건설을 독점

  하게 되었다. 16세기에 멕시코와 페루에서 은광이 발견되었으며, 원주민 강제노동으로 생산된 값싼 은이 대량으로 스페인으로

  유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식민지는 공업제품, 특히 모직물의 수출시장이 되었으므로 16세기 중엽에는 카스티야를

  중심으로 모직물공업이 번창하였다.

  1516년 페르난도·이사벨 두 왕을 외조부모로 하는 합스부르크가()의 카를로스 1(독일 황제로는 카를 5)가 즉위하였으며,

  그의 통치하에서 스페인 본국, 식민지, 독일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 이탈리아령이 통괄되어 태양이 지지 않는스페인

  제국이 출현하였다. 카를로스 1세는 코르테스를 억압하였으며, 공동체적 권리 유지를 주장하고 왕권과 도시 상층부에 반대하는

  시민반란을 1521년 진압하여 절대주의를 완성시켰다.

  그 후 1556년부터 시작된 펠리프 2세 시대의 스페인은 황금시대를 맞이했으나 동시에 몰락의 원인을 잉태한 시기이기도 했다.

  스페인의 위세는 신대륙(서인도) 무역의 독점 위에 구축되었고 그 무역의 기초는 모직물에 있었다.

  국내 모직물 공업이 길드(guild 중세 유럽의 동업자조합)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산업으로서의 발전이 억제되었다.

  따라서 근세 농촌의 자유생산체제에서 발전한 네덜란드·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게 된 것이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은을 들여오는 단순한 경유지로 전락함에 따라 국내산업은 침체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스페인은 부()가 집중되어 있는 네덜란드를 통제하여 세금 징수를 강화하였으나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독주에 도전하는 엘리자베스 왕조의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하였다.

  1588년에는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펠리프가 파견한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의 영국 해군에 의한 격파사건은 스페인의

  몰락과 영국의 해상권 지배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 후 30년전쟁(1618~1648), 부르봉 왕조의 스페인 지배에 따른 스페인 계승전쟁(17011714) 등으로 신흥 해상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크게 번성하였고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국가적 쇠퇴기에도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황금시대를

  맞았는데 16세기 말부터 세르반테스(Cervantes), 로페 데 베가(Lope Feliz de Vega Carpio) 등의 문학자, 엘 그레코(El Greco),

  벨라스케스(Velasquez), 무리요(Murillo) 등의 화가들이 활약하였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스페인은 국가체제 재건을 꾀하였다. 1759년에 즉위한 카를로스 3(Carlos ) 시절에 플로리다 블랑카

  (Florida Blanca) 백작을 비롯한 개화한 정치가들이 계몽전제주의적 관념에 따라 개혁을 단행하였다.

  중상주의(重商主義) 대신 경제자유주의가 추진되고 공업원료의 수입세가 철폐됨으로써 카탈루냐 지방에 미국산 원면(原綿)

  사용한 면직물 공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귀족 교회가 대토지를 소유하고 영세한 농민이 소작에 종사하는 농업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이 빈농(貧農)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채 조세(租稅봉건적 지대(地代) 등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것이 면직물 공업의 국내시장 확대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공업발전과 시민 계급의 성장은 일정한 한계 내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807년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스페인 지배와 이에 협력한 귀족에 대한 저항은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는데 이는 국토 회복과

  동시에 반()봉건 투쟁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1820년의 혁명은 리에고(Riego) 대위의 반란 선언으로 일어난 군대 반란에서

  비롯된다. 반란은 각지 농민의 반봉건 투쟁과 결합, 1821년 봉건적 권리 폐지법안의 채택으로 시민혁명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국왕이 법안 비준을 거부하고 부르주아 계층이 합법적 개혁을 주장하며 농민운동에서 떨어져나감으로써 좌절되었다.

  그 후 1830년대부터는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을 기반으로 한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카탈루냐 공업노동자들에게 러시아 출신 바쿠닌(Bakunin)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소개되어 대토지 소유제

  아래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을 자극, 1869년 카탈루냐·안달루시아에서 공화주의자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고,

  1873년에는 최초의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농민들의 운동은 공화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 공장·토지 점거로 확대

  되었다. 혁명 진압을 위해 부르주아지는 부득이 봉건세력과 동맹하게 되어 1875년에 알폰소 12세의 왕정복고가 실현되었다.

  1876년의 헌법에는 입헌군주제와 제한선거제가 규정되었으나 필요에 따라 헌법을 정지시키는 권한이 정부에 부여되었으며,

  또한 가톨릭의 국교화를 규정하였다. 그러는 동안 미국의 먼로주의 영향으로 아메리카 식민지는 20년대에 태반이 독립하였다.

  또한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의 패배에 따라 쿠바와 필리핀을 잃게 됨으로써 스페인 식민제국은 소멸하였으며 모로코와

  아프리카의 일부만이 식민지로 남았다.

  1885년 알폰소 12세가 28세 나이로 죽자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이 1902년까지 섭정을 한다.

  1902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한 알폰소 13세는 농업문제, 지방독립운동, 노동공세(攻勢) 등이 얽힌 만성적 사회·정치 위기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군사독재(192330)하에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세계공황에 따른 경제 악화로 군사독재와 함께 군주제마저 붕괴되었다.

  19314월 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토지 귀족인 사모라 대통령과 공화주의자인 아사냐 총리가 이끄는 공화국으로는 민주정치

  실현의 기초인 토지개혁을 실현할 가능성이 없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자주 반정부 폭동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정치불안을 이용하여 왕당파(王黨派)와 교권 파시즘을 내세운

  세다당(CEDA) 등이 득세하여 1933년에 우익 정권이 성립되었다.

  193410월 세다당원의 입각을 계기로 아스투리아스의 광산 노동자들이 혁명 코뮌을 결성하고 무력으로 맞섰으나 결국은

  진압되었다. 이 후에 사회당 계통의 노동총동맹(UGT)과 아나키스트 계통의 전국노동연합(CNT)이 제휴하여 1936년 사모라

  대신 아사냐를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7월 봉건 세력의 지지를 받은 군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내전(內戰)이 발발하였다.

  반란군 지역에서는 전 독재자의 아들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가 결성한 팔랑헤당()협동국가주의를 내걸고

  급속히 성장하였으며, 19374월에는 프랑코 장군의 주도 아래 국가 셍디칼리스트 공격단, 전통주의자의 스페인 팔랑헤당

  이라는 이름의 단일 국가정당으로 재편성되었다.

  19393월 프랑코 장군은 독일·이탈리아의 군사원조를 얻어 수도 마드리드를 제압하여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포르투갈(Portugal)

  유럽 이베리아 반도 서부에 위치한 나라로 A.D. 1143년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다.

  15~16세기에 해양왕국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세계 최대의 영토를 소유했지만 18세기 중반 나폴레옹의 침입, 브라질의 독립

  이후 국력이 쇠퇴하였다. 1910년 공화제가 성립되었다.

  정식명칭은 포르투갈공화국(Portuguese Republic)이며, 수도는 리스본(Lisbon)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본토 이외에 대서양의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영토로 한다.

  19741975년에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모잠비크·카보베르데·상투메프린시페·앙골라가 잇달아 독립하고,

  1976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에 병합되었으며, 1999년에는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되어 총면적 209에 이르던 전성기의

  해외 영토가 대폭 축소되었다.

  지중해·북서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의 네 지역을 잇는 해상교통의 결절점에 위치하여 지리상의 발견시대에는 에스파냐와

  더불어 큰 역할을 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하였다.

  국명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 포르투(오포르토)에서 유래했다.

  행정구역은 18개주(distrito), 2개 자치지역(regiao autonoma)으로 되어 있다.

 [자연]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의 메세타(이베리아 고원) 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에스파냐와 경계를 이루는 동부산지와 그 전면에 전개되는 해안평야로 나눌 수 있다.

  동부산지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국토 중앙에 동서로 흐르는 테주강(에스파냐에서는 타호강)을 경계로 북쪽의 북부

  포르투갈은 산이 많은 다우지역이, 남쪽의 남부 포르투갈은 낮은 평야가 많은 건조한 지역이 펼쳐진다.

  북부 포르투갈은 면적의 반 이상이 해발고도 400m가 넘는 결정질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고지이다.

  이는 다시 중앙을 동서로 관류하는 도루(에스파냐에서는 Duero)강에 의해 남북 2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도루강 북쪽 지역은 내륙의 트라즈오즈몬테즈 지방 및 해안의 미뉴·도루리토랄 지방이 나타난다.

  내륙지방에는 갈리시아 지방의 트라즈오즈몬테즈 산지의 일부를 형성하는 산맥이 빗살 모양으로 뻗어 있으며 포르투갈의

  중심부에서도 높은 고원지역을 이루고 있다.

  여러 갈래의 깊은 협곡으로 잘려져 있는 이 지역은 해안을 향하여 점차 계단 모양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지에는 떡갈나무·밤나무 등의 낙엽수림이 많으며, 골짜기의 비탈면에는 옥수수·과일나무가 재배되고 특히 도루강 하곡(河谷)

  에서는 질 좋은 포도가 생산된다. 또 도루강에서 남쪽 테주강까지의 지역은 베이라 지방에 해당하는데 북부보다 산지의 고도가

  낮아지고, 기후도 건조해진다. 해안에는 송림(松林)을 이룬 사구(砂丘)가 발달하고 대서양 연안의 아베이루 지방에는 큰 석호

  (潟湖)가 있어 수향지대(水鄕地帶)를 이루고 있다.

  내륙지방에는 에스트렐라산맥(최고봉 에스트렐라산 1,991m)이 뻗어 있어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은 지역을 이루고 있으며,

  이 산맥에서 발원하는 몬데구강이 평야로 흘러내리는 구릉지에는 고도(古都) 코임브라가 위치해 있다.

  이 지역에서는 포도 이외에 올리브도 재배된다. 북부 포르투갈과 남부 포르투갈 경계를 이루는 테주강은 하류지역에 저평하고

  비옥한 충적평야를 형성하여 농업지대를 이룬다.

  또 강어귀에는 로마시대부터 양항(良港:배가 드나들거나 머물기에 좋은 항구)으로 알려져 있는 수도 리스본이 있다.

  테주강 이남의 남부 포르투갈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완만한 구릉을 이루는 저지대(低地帶)가 많아진다.

  기후도 건조하여 지중해 지역과 비슷한 경관을 나타내고 있으며, 해안의 에스트레마두라 지방, 내륙의 알렌테주 지방 및 최남단

  의 알가르베 지방으로 나누어진다. 알렌테주 지방의 산지는 메세타의 서쪽 연변에 해당하며 히스로 덮인 황야에는 코르크나무

  숲이 넓게 펼쳐져 코르크·올리브의 대표적인 재배지이다.

  중요한 하천은 북쪽에서부터 미뉴(에스파냐와 경계를 이룬다), 도루, 테주, 과디아나강 등이다.

  이 강들은 에스파냐에서 발원하여 거의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유입한다.

  일반적으로 급류이며 하천운항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기온은 대체로 온난하다. 북부 포르투갈의 연평균강수량은 1,500mm 안팎이며 포르투갈에서도 습윤한 지역으로 해양성(대서양

  형)의 온화한 기후를 나타낸다. 그러나 산악지대는 극심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국토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연평균강수량 500mm 이하의 건조지역으로 바뀌며, 겨울에 비가 많이 오는 지중해성이 된다.

  또한 포르투갈은 알프스 히말라야 지진대에 속하기 때문에 유사 이래 몇 차례의 대지진이 기록되고 있으며, 특히 1775년 리스본

  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삼림면적은 국토의 28%로 주로 북부 해안지대에 산림이 많고 남부의 코르크나무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자원이다.

 [역사]

  선사시대에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하여 온 여러 종족의 혼혈로 형성된 켈트계 이베리아인 원주민은 BC 12세기에 페니키아인,

  BC 8세기에는 그리스인의 영향을 받았다.

  BC 2세기부터 로마의 속주(屬州)가 된 뒤 로마화가 시작되어 루시타니아라고 불렸으며, 로마문화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아

  농경양식, 도시의 건설, 언어, 생활양식 등 여러 면에서 아직까지 로마시대의 양식이 남아 있다.

  그후 고트족 등 게르만계 부족들의 침입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교도 널리 전파되었다.

  8세기에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으로 국토 대부분이 그들의 지배에 들어갔으나 그리스도교도에 의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다. 1095년 프랑스 왕족 앙리 드 부르고뉴가 포르투갈 백작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아폰수

  엔리케시가 테호강 북쪽을 평정하여 카스티야로부터 독립하고 1143년 포르투갈왕()이 되었다.

  국토회복운동은 1249년에 완료되어 오늘날의 영역이 정해졌다.

  남부의 실지 회복운동은 종교기사단(宗敎騎士團)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남부에는 봉건적 귀족령이 형성되었으나 북부에는

  일찍부터 자유농민에 의하여 집약적인 농업경영이 이루어졌다.

  14세기 주앙 1(13851433) 때부터 왕권은 리스본의 상인계급과 결탁, 절대주의화하였으며 영국과의 동맹이 시작되었다.

  주앙 1세의 아들 엔히크는 항해왕(航海王)이라고도 불렸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을 비롯한 신항로 발견에 노력하여 곧 인도항로와

  브라질을 발견(1500)함으로써 포르투갈은 해양왕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은 사금과 노예의 획득, 향료를 비롯한 몇 가지 농산물의 수입에 주력하였으며, 수도 리스본은

  각지로부터 유입된 부()의 집산지로써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부는 왕실과 귀족에게만 집중되었으며, 이들의 낭비와 경제

  정책의 실패로 인하여 귀금속을 비롯한 부가 국외로 유출되어 국내 부르주아는 형성되지 못하였다.

  포르투갈의 해외진출은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무역과 함께 포교활동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국내에서는 반종교 개혁의 중심으로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또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슬람· 인도· 고딕풍()이 뒤섞여 조화를 이룬 마누엘 양식이 확립되는 등 독자적 르네상스 문화가

  개화하였다. 우스 루지아다스로 유명한 국민시인 카몽이스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1572년에 출판된 이 불후의 명작은 포르투갈 문학 최고 걸작으로 그리스의 호메로스에 비견되는 웅장한 국민적 서사시이며,

  그 주제는 바스쿠 다 가마의 항로발견 등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 것이다.

  1578년 세바스티안왕()이 북아프리카 원정에서 전사한 뒤, 1580년부터 60년 동안 에스파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1640

  브라간사공()이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어 다시 독립을 쟁취, 브라간사공은 주앙 4세가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의 경제적 종속이 점차 심화되었으며, 1703년에는 메스엔 조약에 따라 영국공예제품의 자유로운 수입이 인정되고

  낮은 관세로 포르투갈산() 포도주의 영국 수출이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브라질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도 점차 네덜란드· 영국의 진출에 의해 축소되어갔다.

  18세기 후반에는 퐁발이 예수회(Jesuit )의 해산 등 국내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의 정책은 너무 서두른 나머지 봉건세력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실패로 끝났다.

  19세기 초에는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하여 왕실 일족은 브라질로 망명하였으며, 영국· 포르투갈 연합군과 프랑스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영국 장군이 섭정(攝政)으로 부임, 포르투갈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으나 1820년에 에스파냐

  내란에 호응하여 반영국(反英國) 입헌파(立憲派)의 혁명이 일어나 국왕이 복귀하여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었다.

  1822년에 최대의 식민지인 브라질이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 포르투갈의 국력은 쇠퇴해 갔다.

  프랑스 혁명사상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포르투갈도 근대화를 겨냥한 여러 가지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국내 산업기반이 취약하여 중산층 성장이 어려웠으므로, 중앙은행의 설립 등을 제외하고는 두드러진 성과가 없었으며,

  반대로 19세기에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항쟁 와중에서 1908년 국왕 카를로스 1세와 그의 왕자가 암살되었고 1910년 총선거 후 공화파의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 2세가 퇴위하고 공화제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그후에도 쿠데타가 되풀이되고 노동운동도 격화하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측에 가담, 참전하게 됨으로써 국력은 피폐해졌고 경제적 위기는 극도로 심화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독재정치를 유발하여 1926년에는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장군 코스타의 독재정권이 출현하였으나 이 정권은

  경제정책의 실패로 실각하였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카르무나는 1928년 코임브라대학 교수 살라자르를 경제장관으로

  기용하여 재정의 전권(全權)을 맡기고 극단적인 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하여 3년 만에 경제를 재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살라자르는 1932년 총리가 된 뒤 1933년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무솔리니를 모방하여 공화제적 조합국가(共和制的組合國家)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강력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살라자르는 비밀경찰을 창설하고 검열제도를 실시하는 한편 국민연합당

  이외의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 조치 등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1969년 살라자르가 신병으로 사임하고(1970년 사망), 카에타노가 후임이 되었으나 국내 반체제파(反體制派)의 불만이 고조됨과

  동시에 아프리카 식민지 등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졌다.

  ‘세계 최후의 식민지제국이라고 불리던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카에타노 정권의 탄압정책은 여러 차례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19744월 민주화를 목표로 군부 소장파 장교들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40년 이상 계속된

  독재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르투갈의 쿠데타 후 군부는 산업 국유화 등 국내의 사회주의화에 착수하였다.

  독재정권시대의 유일한 정당인 국민연합당은 해체되고 새로운 정당들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쿠데타 후 대통령에 취임한 스피놀라 장군은 좌파(左派)의 압력으로 19749월 사임하고 고메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53월에는 스피놀라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 군부가 쿠데타에 실패하여 스피놀라는 브라질에 망명(19768월 귀국)하였고,

  이를 계기로 군부는 좌경화(左傾化)하여 최고군사혁명 평의회가 설치되었다.

  19754월 민정이양의 제1단계로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19764월 제헌의회에서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명문화한

  새 헌법이 채택되어 이에 근거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에서는 사회당이 득표율 34.9%107석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어 1원제의 입법의회(정수 263)가 발족하였다.

  이어 6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사회·민주대중·사회민주중앙 3당의 지지로 에아네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소아레스를 총리로 하는 사회당 단독내각이 발족함으로써 일단 의회제 민주주의의 형태가 성립되었다.

  사회당이 제1, 민주대중당(현재의 사회민주당)이 제2당이 되어 군부·사회당·민주대중당의 연립정권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군부의 좌경화에 비판적인 사회·민주대중당이 이탈하여 연립정권은 붕괴되고 군부·공산당 연합세력이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후 군부 온건파의 반격 등 정국은 좌우로 동요되어 혼미가 거듭되었다.

  경제위기와 당내의 좌우대립으로 고민하던 소아레스 내각은 19771월 총사직하였고, 19781월에는 사회·사회민주중앙당의

  연립으로 제2차 소아레스 내각이 발족하였다.

  그러나 양당의 대립으로 7월 총리 소아레스는 해임되고 그후 무소속의 다고스타 내각, 핀토 내각, 첫 여성 총리인 핀타실코

  내각이 차례로 구성되었다. 197912월 대통령 에아네스는 의회를 해산하고 임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보수파 연합의 민주동맹

  (AD)이 과반수를 획득, 사카르네이로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이로써 정치의 주도권은 혁신세력으로부터 보수파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198010월 총선거에서도 총리 사카르네이로의 민주

  연맹이 재집권하였다.

  이어서 198012월 대통령선거에서는 좌파의 지원을 받은 대통령 에아네스가 재선되고 이듬해 월프람시스코 핀토 발세마우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발족하였으나 여당 내의 대립으로 8월에 총사직하였으며 9월 제2차 발세마우 내각이 발족하였다.

  발세마우 내각은 국유화 정책의 완화, 농민이 접수한 농지의 일부반환 등 자유경제 체제로의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1976년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사회당과의 타협에 의해 19828월 국회를 통과한 신헌법 초안은 9월 대통령 에아네스에 의해 공포되었다.

  한편 발세마우 내각은 대통령과의 마찰로 물러나고, 1983년의 총선거에서는 사회당 서기장 소아레스를 총리로 하는 새 내각이

  발족하였으나 단명으로 끝나고, 1985년 실바 내각이 들어섰다.

  1999년에는 사회당과 사회민주당의 주도로 양당체제가 정착되었으며, 1995년 총선거 결과는 사회당(PS) 112, 공산·녹색당

  연합(CDU) 15, 사민당(PSD) 88, 대중당(PP) 15석으로 공산당과 대중당 같은 과격세력이 퇴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1997년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은 지방선거 사상 최고의 득표율(40.5%)을 기록하였다.

  1998년 지방자치 개혁 국민투표에서 정부여당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사회당 및 총리에 대한 지지 여론은 변동이 없다.

  총리 안토니우 구테헤스가 이끄는 사회당은 199910월 총선거에서도 승리하여 2기에 들어갔으나 2001년 초부터 경제부진,

  정권운영의 혼란 등으로 인하여 총리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일어났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2월 실시된 통일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최대 야당인 사회민주당에 대패하였고 총리는 사임을 표명하였다.

  그 결과 20023월 조기 총선거를 실시하여 사회민주당이 1995년 이후 7년 만에 승리함으로써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사회민주당 총재 호세 마누엘 듀라오 바로소가 총리에 선출되어 오늘에 이른다.

 

< 1일차(329, ) : 광주~인천국제공항 >

 

 

 

 

 

< 2일차(330, ) : 인천국제공항~카타르 도하공항~스페인 마드리드공항~똘레도~마드리드 >

 

 

 

 

 

 

 

 

 

 

 

 

 

 

 

 

 

 

 

 

 

 

 

 

 

 

 

 

 

 

 

 

 

 

 

 

 

 

 

 

 

< 3일차(331, ) : 마드리드(솔광장, 마요르광장, 프라도미술관)~포르투갈(파티마대성당) > 

 

 

 

 

 

 

 

 

 

 

 

 

 

 

 

 

 

 

 

 

 

 

 

 

 

 

 

 

 

 

 

 

 

 

 

 

 

 

 

 

 

 

 

 

 

< 4일차(41, ) : 포르투갈(까보다로까, 리스본 로시우광장, 벨렘탑, 제로니모스 수녀원)~스페인 세비야 >

 

 

 

 

 

 

 

 

 

 

 

 

 

 

 

 

 

 

 

 

 

 

 

 

< 5일차(42, ) : 세비야(세비야대성당, 마차투어, 황금의 탑, 스페인광장)~론다~미하스~그라나다(야경투어) >

 

 

 

 

 

 

 

 

 

 

 

 

 

 

 

 

 

 

 

 

 

 

 

 

 

 

 

 

 

 

 

 

 

 

 

 

 

 

 

 

 

 

< 6일차(43, ) : 그라나다(알함브라궁전, 헤네랄리페정원)~카스테욘 >

 

 

 

 

 

 

 

 

 

 

 

 

 

 

 

 

 

 

 

 

 

 

 

 

 

 

 

 

 

 

 

 

< 7일차(44, ) : 카스테욘~몬세라트(케이블카, 수도원)~바르셀로나(몬주익언덕,카사밀라 저택, 구엘공원, 성가족성당) >

 

 

 

 

 

 

 

 

 

 

 

 

 

 

 

 

 

 

 

 

 

 

 

 

 

 

 

 

 

 

 

 

 

< 8일차(45, ) : 바르셀로나(람브라스 거리)~바르셀로나 공항~카타르 도하공항 >

 

 

 

 

 

 

 

 

 

 

 

 

 

 

 

 

 

 

 

 

 

 

 

 

 

 

 

< 9일차(46, ) : 카타르 도하공항~인천공항~광주 >

 

 

 

 

 

 

 

 

 

 

 

 

 

 

 

 

 

 

 

 

 

Mea Cul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