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기행] 낙동강을 굽어보는 서원, 백일홍이 아름다운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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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기행] 낙동강을 굽어보는 서원, 백일홍이 아름다운 병산서원

by 정산 돌구름 2016. 8. 17.

낙동강을 굽어보는 서원, 백일홍이 아름다운 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2016년 8월 15일, 폭염경보는 계속되지만 봉정사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길목에 병산서원을 찾았다.

2km가 넘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낙동강변에 이르니 주차장이 있고 만개한 배롱나무 사이로 병산서원이 바라보인다.

낙동강을 굽어보며 배롱나무 꽃이 만발한 병산서원을 보는 것도 안동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코스라고 할 수 있다.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에 자리한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사적 제260(1978331)로 지정되어 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그 셋째 아들 소암(修巖)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이다.

모태는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이 서당은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 고장에

왔을 때 면학하는 유생들을 가상히 여겨 내려준 토지 8백 두락을 받기도 했다.

1572년에 류성룡이 지금의 장소로 옮겼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광해군 2(1610)에 류성룡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를 중심으로 한 사림에서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여

사묘인 존덕사(尊德祠)를 짓고 향사하면서 서원이 되었다.

1863(철종 14) 병산(屛山)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해내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의 서원중 하나이다.

서원의 앞쪽에 위치한 만대루는 병산서원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로 대강당 역할을 하던 곳이다.

2층으로 넓게 지어진 만대루에서는 서원 앞에 펼쳐진 낙동강과 너른 백사장, 병풍과 같은 산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서원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정갈하게 자리 잡은 각 건물들의 조형미가 빼어나 꼭 가봐야 할 안동 여행지로 꼽힌다.

류성룡의 문집을 비롯한 각종 문헌 3,000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해마다 봄, 가을에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병산서원은 화산을 주산으로 그 산자락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전면의 낙동강 건너에는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이 있다.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연못이 있고 맞은 편 한 단 높은 곳에 옆으로 기다랗게 만대루(晩對褸)가 서있다.

누 밑은 휘어진 자연 상태 그대로의 꾸불꾸불한 기둥이 받치고 있다.

2층 누마루에는 반듯하게 다듬은 기둥들이 사방을 둘러쌌는데 벽은 두르지 않고 트여 있다.

한쪽으로는 병산과 낙동강이 펼쳐지는 주변 풍광을 다 끌어안을 수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원 일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만대루의 '만대(晩對)'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루(百濟城樓)>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翠屛宜晩對)”에서 인용한 것으로, ‘병산의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서야 대할 만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만대루 밑을 통해 마당에 들어서면 서원의 중심으로 학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당건물인 입교당(立敎堂)과 좌우로 학생들의

기숙사로 쓰였던 동재와 서재,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책을 인쇄하던 장판각 등이 들어서 있다.

학생들이 강의를 듣던 입교당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立敎)는 뜻에 걸맞게 서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강당 대청 한가운데에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앞쪽을 바라보면, 서원 일대의 경관이 또 다른 모습으로 얽혀 들어온다.

만대루 2층 누 7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7폭 병풍이 되어 얽히며 펼쳐지는 풍경은 한폭의 그림이다.

강당 동쪽 옆을 돌아 들어가면, 잘생긴 배롱나무가 심어진 언덕 위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사당인 존덕사(尊德祠)에는 북벽에 유성룡을 주벽으로 모시고, 동벽에 유진(柳袗)을 종향(從享)하고 있다.

사당은 강당과 함께 맞은편 병산을 향하고 있는데, 산봉우리를 마주 대하지 않고, 산 능선의 약 7부쯤 되는 곳을 향하고 있다.

사당으로 출입하는 신문에는 태극 문양을 그렸고, 길게 다듬은 기둥 초석에는 팔괘를 그려놓았다.

퇴계 이황에게 수학한 서애는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영의정(領議政)으로 국가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1598(선조 31) 이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하회(河回)마을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 건너 부용대 기슭에 있는

옥연정사(玉淵精舍)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하였다.

국보 제132호인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간의 전황을 기록한 책이다.

병산서원은 하회마을과는 화산(花山)을 사이에 두고, 병산서원은 화산 동쪽 기슭에, 하회마을은 그 반대쪽에 있다.

병산(屛山)’은 강원도에서 발원한 낙동강 물줄기가 모처럼 넓게 트인 곳을 만나 센 물살을 만들며 항아리 모양으로 돌아나가

강변에 병풍(屛風)처럼 산이 펼쳐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