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자연 학습의 장, 광주호 호수생태원, 그리고 왕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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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트레킹/발길 머무는 곳에

도심 속 자연 학습의 장, 광주호 호수생태원, 그리고 왕버들..

by 정산 돌구름 2015. 6. 7.
도심 속 자연 학습의 장, 광주호 호수생태원, 그리고 왕버들..

 

2015년 6월 7일 일요일, 구름 조금 낀 맑은 날씨..

광주호 호수생태원을 둘러보고 인근의 천연기념물 제539호로 지정된 충효동 왕버들, 충효동 정려비각, 환벽당을 둘러본다..

이른 시간의 광주호(光州湖)  호수생태원은 고요하기만 하다.

광주호반 185,124㎡의 부지에 자연관찰원, 자연학습장, 잔디휴식광장, 수변 습지 등 테마별 단지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광주시내에서 약 30분 정도 거리에 있어 2006년 3월에 개장한 후 아이들의 자연생태학습장이자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된다.

수생식물원·생태연못·야생화테마원·목재탐방로·전망대·수변관찰대 등이 있으며, 호수 안에는 버드나무군락지와 습지보전지역이 있다.

매자기·애기부를 비롯한 수많은 수생식물과 다양한 종의 조류·파충류·양서류를 관찰할 수 있다.

입구에는 400년 수령의 왕버들나무가 있고, 공원 가까이에 식영정·환벽당·소쇄원 등의 문화유적들이 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시원한 느낌을 받는 공원으로 한겨울 날씨가 아니라면 꽃이나 동·식물들의 생태자료를 직접 볼 수 있다.

진달래, 개나리, 자산홍, 장미, 철쭉, 수국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 17만 본이 심어진 테마별 꽃단지와 부엽식물원, 수변부 관찰 테크,

암석원, 그리고 때죽나무, 모과나무, 벽도동, 단풍나무 등 3000여 그루의 나무 등이 볼만하다.

늪지에서 각종 새들이 실제로 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메타세콰어이 양편 가로수 사이로 목재계단을 조성하여 연인들이 걷기 좋은 낭만의 길을 연출한다.

 

 

 

 

 

 

 

 

 

 

 

 

 

 

 

 

 

 

 

 

 

 

 

 

 

 

 

 

 

 

 

 

 

 

 

 

 

 

 

 

 

 

 

 

 

 

 

 

 

 

 

 

 

 

 

 

환벽당(環碧堂)은 1972년1월29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金允悌)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며, 당호는 신잠이 었다.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조자이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으며, 그의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과 김성원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와 용소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 기대승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취가정(醉歌亭)은 한창 공사중이다.

충장공 김덕령이 출생한 곳으로서 환벽당 남쪽 언덕 위에 있는 조선시대 말기의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1890년(고종 27년) 후손 김만식 등이 세웠다.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1955년 재건하였다. 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는데 대부분의 정자들이

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과 달리 넓게 펼쳐진 논과 밭들을 향하여 세웠다.

정자 앞에 서있는 소나무는 정자의 운치를 한결 더해준다.

정자의 이름은 정철의 제자였던 석주 권필의 꿈에서 비롯하였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김덕령이 꿈에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고 맺힌 노래 <취시가(醉時歌)>를 부르자,

권필이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醉時歌 此曲無人聞 我不要醉花月 我不要樹功勳 樹功勳也是浮雲 醉花月也是浮雲 醉時歌 此曲無人知 我心只願長劍奉明君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구름 /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구름
한잔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네
내 마음 다만 바라기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고자

“지난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장한 뜻 중도에 꺾이니 천명()을 어찌하리······.”

 

 

 

 

 

 

 

광주기념물 제4호(1985년2월25일)로 지정된 충효동 정려비는 정조13년(1789년)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220㎝이다.

앞면에 <朝鮮國贈左贊成忠壯公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조선국증좌찬성충장공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

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김덕령 일가의 애국충절에 대한 찬양과 정조(正祖)가 이름을 지어준 충효리의 유래가 쓰여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비는 정조16년(1789년)에, 비각은 1792년에 세운 것인데, 비각은 그 뒤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각 앞면에는 전주부윤 한용구가 쓴 ‘正祖御製綸音(정조어제윤음)’이 걸려 있고, 비각 내부 우측에 ‘충효리 비각 상량문’,

‘충효리 비각 중수기’의 기록문들이 있다.

비각 안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과 정유재란 때 왜군의 추격을 받고 순절한 김덕령의 부인 흥양이씨, 임진왜란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김덕령의 형 김덕홍(金德弘), 효성이 지극했던 김덕령의 아우 김덕보(金德晋)를 기리는 비가 있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본관은 광주(光州), 붕섭(鵬燮)의 아들로 자는 경수(景樹)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 담양부사 등에 의해 의병장에 천거되어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았고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막기 위해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1596년 충청도 홍성에서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잡혀가 문초를 받던 중에 옥사하고 말았다.

후일 좌찬성을 추증받았으며 충장(忠莊)이란 시호를 받았다. 형인 덕홍은 고경명을 따라 금산싸움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6호(1985년2월25일)로 지정되었다가 천연기념물 제539호(2012년10월5일)로 지정된 충효동 왕버들..

충효동 마을에서 인공호수 광주호에 이르는 도로변에 있는 이 왕버들은 3그루로써 추정수령은 약 400년이다.

원래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 상징이던 소나무 1그루, 매화 1그루, 왕버들 5그루가 있었으나 매화와 왕버들 1그루는

말라 죽었으며, 또 1그루의 왕버들과 소나무는 마을 앞 도로를 확장하면서 잘라버려 지금은 왕버들 3그루만 남아있다.

첫번째 것은 높이 9m, 둘레 6.25m, 수관(水冠) 너비 동서 11.5m, 남북 18.9m이고, 두번째 것은 높이 10m, 둘레 5.95m,

수관 너비 사방 14m이며, 세번째 것은 높이 12m, 둘레 6.3m, 수관 너비 동서 16.6m, 남북27m이다

충효동의 역사는 분명치는 않으나 예부터 성(城)이 있어 성안 또는 석저촌(石低村)이라 불렀다.

이 일대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양산보(梁山甫)의 소쇄원(瀟灑苑)을 비롯하여, 김윤제(金允悌)의 환벽당(環碧堂), 김성원(金成遠)의

식영정(息影亭)과 누하당(樓霞堂) 등의 원림(苑林) 정각(亭閣)이 많이 있어 주변 조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곳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등지의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의 낙엽활엽대교목으로 가장 몸집이 크게 되는

버들속의 나무이고 장수하는 까닭에 전국에 노거목이 많은 편이다.

버드나무에 비해 키가 크고 잎도 넓기 때문에 왕버들이라 불리며, 잎이 새로 나올 때는 붉은 빛을 띠므로 쉽게 식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