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기행] 마이산 금당사(金塘寺)와 보물 제1266호 괘불탱(掛佛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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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기행] 마이산 금당사(金塘寺)와 보물 제1266호 괘불탱(掛佛幀)

by 정산 돌구름 2015. 4. 26.
마이산 금당사(金塘寺)와 보물 제1266호 괘불탱(掛佛幀)

 

○ 탐방일 : 2015년 4월 26일

○ 소재지 :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41

○ 금당사 소개

  마이산(馬耳山)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금당사(金堂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로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650년(의자왕 10년)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의 11제자 중 한 사람인 무상(無上)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와

  함께 세웠다고 한다. 당시 위치는 지금보다 약 1.5㎞ 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동굴을 법당

  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1675년(숙종 1년)의 일이다.

  다른 하나의 창건설은 814년(헌덕왕 6년) 중국 승려 혜감(慧鑑)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한때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고 수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쳤는데, 한때 고려 고승 혜근(惠勤)도 이곳에 머물며 수도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쇠락하였으나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창하였다.

  그 뒤 1978년에는 명부전, 1987년에는 산신각, 1990년에는 극락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ㆍ지장전ㆍ삼성각ㆍ대방(大房) 등이 있다.

  대웅보전은 약 300여 년 전에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웅보전에 봉안된 6척의 목불좌상(木佛坐像)은 동구나무로 만든 것으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고,

  너비 5m, 길이 9m의 괘불(掛佛)은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대웅전 앞에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탑 1기가 있는데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1986년9월8일)로 지정된 금당사석탑 (金塘寺石塔)..

금당사 경내에 있는 탑으로, 현재 남아있는 부재들로 보아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부(基壇部)는 가운데 돌이 없어져 다른 돌로 대신하였으며, 갑석을 얹은 위에 3층의 옥신과 옥개석을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소형 석탑으로 제작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대웅보전은 약 300여 년 전에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6척의 목불좌상(木佛坐像)은 동구나무로 만든 것으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고,

너비 5m, 길이 9m의 괘불(掛佛)은 보물 제1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호(1973년6월23일)인 금당사 목불좌상(木佛坐像)..

높이 1.69m로 대웅보전에 봉안된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중 본존불만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치 칼로 빚어낸 듯 경직된 조선시대의 목조여래좌상으로 머리와 상체·하체가 벽돌을 쌓듯 비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순박하고 투박한

조선 후기의 조각 양식이 반영되어 있다.

머리는 예리하고 촘촘한 나발(螺髮)이지만 육계(肉髻)의 윤곽이 불분명하며 중앙계주(中央髻珠)와 정상계주(頂上髻珠)가 솟아 있다.

넓적한 얼굴은 날카로운 눈과 직선적인 코, 꽉다문 작고 얇은 입으로 무표정하며 목에는 좁은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를 걸친 신체는 신체 볼륨이 약화되어 사각형의 둔중한 형태미를 나타낸다.

직선적으로 넓게 트인 옷깃, 밋밋한 가슴, 가슴을 가로지르는 단순한 군의(裙衣) 주름, 양팔에 걸쳐진 폭이 넓은 옷자락은 평판적으로

도식화되었으며, 오른쪽 겨드랑이를 따라 드리워진 옷자락은 반전하여 복부의 옷자락 속으로 여며져 있다.

따로 만들어 끼운 양손은 각각 엄지와 장지를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을 맺고 있어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세부 형식과 함께 판에 박은 듯 경직된 얼굴과 신체, 폭이 넓고 단순화된 평판적인 옷주름 등은 경상북도 상주의 용흥사(龍興寺)

목조아미타불좌상(1647년 추정)이나 예천의 용문사(龍門寺) 목불좌상(1684)과 같은 17세기 불상 양식과 흡사하다.

현재의 금당사 대웅보전은 1675년(숙종 1년)에 중건한 것으로 양식상 이 목불좌상도 대웅전 중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좌우의 협시보살(높이 1.42m, 1.28m)은 모두 손에 연꽃 줄기를 쥐었다.. 

 

 

 

 

 

 

 

보물 제1266호(1997년8월8일)로 지정된 금당사 괘불탱(掛佛幀)..

1692년(숙종 18)에 명원(明遠), 허헌(虛軒) 등 4명의 화원 비구(畵員比丘)가 마포(麻布) 위에 진당채(眞唐彩)로 그렸다

원형 두광(頭光)에 거신광배(擧身光背)를 지닌 본존불은 좌향한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독존 형식의 보관불이다.

머리에 7면의 얼굴들 좌우로 봉황이 장식된 보관(寶冠)을 쓴 보관불의 둥근 얼굴에는 긴 눈과 작은 입이 묘사되었다.

그리고 좁은 어깨의 신체는 세장(細長)한 편으로 안정감이 있다.

거신광배 안에는 꽃무늬마다 범자(梵字)를 새긴 장식적인 광배(光背 )로 화려하다. 광배의 바깥, 좌우로 열 구씩 등장한 총 이십 구의

화불(化佛)은 충남 무량사 미륵불괘불탱(1627년 작) 및 개심사 영산회괘불탱(1772년 작)과 연결된다.

보관불의 가슴을 가린 내의(內衣) 위로는 띠가 왼쪽 어깨를 지나 오른쪽 겨드랑이로 비스듬히 지나간다.

이 띠는 가슴 아래에서 묶어져 흘러내렸고, 어깨를 덮는 천의(天衣) 자락은 복부에서 두 번 유(U)자형을 이루며 팔 위로 늘어지고,

허리띠는 매듭지어져 무릎 사이로 흘러내렸다.

보관과 목걸이, 치마인 상의(裳衣)는 영락(瓔珞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과 꽃무늬, 다양한 수식(垂飾 드리개) 등으로 매우 화려하다.

주조색인 적색과 녹색을 중심으로 하늘색, 황색, 흰색, 분홍색, 금채(金彩)가 돋보이며 화사한 문양과 함께 부드러운 분위기를 나타낸다.

7면의 얼굴이 새겨진 보관, 수인, 연꽃모양의 지물(持物), 착의법, 광배, 무수한 화불의 배치 등은 무량사 미륵불괘불탱과 비슷하다.

이와같이 연화수 지물을 든 단독 형식의 보관불은 율곡사(1684년), 적천사(1695년), 수도사(1704년), 청량사(1725년), 법주사

(1766년), 통도사(1767년, 1792년), 쌍계사 괘불탱(1799년) 등 18세기에 다수 제작되었다. 이는 주로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17세기에 유행한 군도 형식의 보관불에서 발전된 것으로, 이들의 존명(尊名)은 미륵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불 등 다양하다.

화기(畵記)에 바탕(波湯), 복장(腹藏), 초지(草紙), 후배지(後排紙), 주홍(朱紅), 하엽(荷葉), 오색사(五色絲), 아교(阿膠), 말장(末醬),

원경(圓鏡) 등 괘불탱 제작에 필요한 물품을 시주한 명단이 자세하게 명시되어 있다.

통도사 관음보살괘불탱, 무량사 미륵보살괘불탱 등과 함께 걸작으로 꼽히며, 가뭄이 계속될 때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왔다는

전설이 있다. 괘불탱은 일반적인 불화와는 달리 주로 야외의식에 쓰이며 높이가 10m 정도의 초대형으로 평소에는 말아서 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