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 4박5일(제4일) - 3.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용정 윤동주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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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중국

중국 여행 4박5일(제4일) - 3.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용정 윤동주생가..

by 정산 돌구름 2019. 10. 3.

중국 여행 4박5일(제4일) - 3.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용정 윤동주생가..


 

중국여행 4박5일 넷째날,

이도백하 천정호텔에서 2일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6시에 어침식사를 한다.

7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1시간20분을 달려 중간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간다.

휴게소에는 장뇌산 농장이 있어 잠시 휴게소 뒤편의 농장을 둘러본다.

다시 차를 달려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차창으로 일송정을 바라본다.

9시50분, 용정에 도착하여 쇼핑센터(라텍스)를 둘러보고 11시20분 점심식사를 한다.

12시30분, 용정 명동학교를 둘러본다.

12시50분, 인근의 윤동주 생가에 잠시 머무른다.

 

[ 제4일차 - 2019년 10월 1일 ]

06:00 호텔 조식 ⇨ 07:00 호텔 출발 09:50 용정 도착(쇼핑센터) ⇨ 11:20 점심식사 ⇨ 12:30 용정 명동학교 ⇨ 12:50 윤동주생가 ⇨ 14:00 용정지명기원우물  15:10 쇼핑센터(죽제품) ⇨ 16:40 진달래광장 ⇨ 17:15 저녁식⇨ 18:50 동북아호텔 도착

 

항일 독립운동의 본거지, 룽징(龍井)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중부에 위치하며, 주도()인 엔지(吉)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는 상공업도시이다.

1913년에 옌볜현이 설치되었다가 1983년에 룽징현으로 개칭하였고, 1988년 7월에 시()로 승격하였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3·13만세운동의 현장(용정중앙소학교)을 비롯하여 1880년경 한국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용정 기원

() 우물이 있다.

삼림 및 광산자원이 풍부하여 동, 은, 납, 아연 등이 채굴되며, 공업으로는 기계·화학·제지·야금·피혁 등이 생산된다.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며, 주변의 비옥한 농경지에서는 쌀·콩·수수·옥수수·아마()·사과·배

등 농산물을 산출한다.

장춘(長春)과 도문(們)간의 창투철도(가 시내로 지나며, 교육기관은 3개의 대학원과 146개의 소·중·고등학교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비암산의 일송정(), 3·13반일의사의 묘지, 시인 윤동주의 묘지, 한왕산고성() 유적 등이 있다.

시내는 현대적 도시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백두산 관광기지로도 큰 몫을 한다.

만주벌판에 있었던 용정촌()은 일제시대에 한민족이 거주하며,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나라 잃은 한민족에 의해서 황무지에 건설된 마을이 집단화되었으므로 용정은 한민족의 결집력을 강화한 최초의 공동시설이다.

그리고 민족 번영과 항일독립을 위한 교육시설로서 1906년에 이상설()에 의해 세워진 서전사숙(瑞甸書塾)이 있던 곳이다.

 

용정 윤동주생가(尹東柱生家)

지린성(省) 옌볜조선족자치주(州) 룽징(井) 명동촌()에 있는 복원된 윤동주 시인의 생가이다.

1900년경 조부 윤하현이 지은 남향의 기와집으로 열 칸과 서쪽에 자리한 동향의 사랑채가 있는 전통적인 구조로 이루어졌다.

윤동주가족이 이사간 후  팔렸다가 1981년 허물어졌고, 1994년8월 옌볜변대학 조선연구센터 주선으로 복원되었다.

윤동주가 유년기에 공부한 방, 방학 때 귀향하여 시를 쓰던 방이 당시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

주변에는 외숙인 김약연()이 세운 명동교회, 윤동주 기념비, 윤동주가 1939년 9월에 쓴 시 ‘자화상(像)’에 나온 우물,

명동학교 유적, 일본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했던 나무 그루터기 등이 있다.

명동촌은 용정에서 서남쪽으로 15㎞ 떨어진 곳으로 문치정·남위언·김하규·김약연 등 네 집안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형성하였다.

1899년~1905년에 형성되었는데 용암·장재·대룡·영암 등을 묶어 명동촌이라고 부른다.

주변의 소룡동·풍락동·들미동·중왕동·상중왕동 등을 포함하여 명동촌이라고도 한다.

1910∼1920년대 중국 북간도 지역 한인의 문화교육운동 중심지였다.

명동촌이 자리한 곳의 원래 이름은 ‘비둘기 바위’라는 뜻을 지닌 ‘부걸라재(鴿)’였다.

그 뒤 김약연 등이 이곳을 ‘동방, 곧 한반도를 밝히는 곳’으로 만들고자 ‘명동촌’이라고 이름하였다.

1899년 2월18일에 문치정() 집안 40명, 김하규() 집안 63명, 김약연() 집안 31명, 남위언() 집안의 7명,

안내자 김항덕 등 142명이 이상촌 건설과 인재교육 등을 목적으로 북간도 부걸라재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부걸라재를 ‘명동촌’이라고 이름하고는, 부걸라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고자 하였다.

당시 일대의 토지는 중국인 지주인 동한()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총면적 약 600만 평 가운데 대부분의 땅은 산림이었고,

개간된 땅은 불과 4∼5만 평 정도였다.

네 집안은 1,000여 경 규모의 땅을 매입하였는데, 당시 1경은 소 한 마리가 하루 동안 갈 수 있는 크기였다.

그 뒤 공동으로 부담하여 학전()을 마련하였고, 학전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육 기금으로 사용하였다.

문치정 집안은 동구(), 김하규 집안은 대사동(, ), 김약연 집안은 선봉() 남쪽 기슭인 장재촌(), 남위언

집안은 중영촌()에 각각 정착하였다.

1900년에는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가족을 이끌고 용암동(, 학교촌)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1899년∼1905년에 용암·장재·대룡·영암 등 4곳의 대표적인 마을이 명동촌이라고 불렸고, 주변의 소룡동·풍락동·들미동

·중왕동·상중왕동 등도 점차 명동촌의 외연에 포함되었다.

한편 김약연 등은 명동촌을 기울어 가는 조선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901년에 김약연은 장재촌에 ‘규암재()’를 세웠고, 남위언은 상중영촌에 ‘오룡재()’를 두었으며, 김하규는 대룡동에

‘소암재()’라는 서재를 각각 건립하여 학동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1908년 4월 27일에는 김약연 등이 여러 서재를 합하여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다.

명동서숙은 서전서숙()에서 근무하였던 교사들을 초빙하여 그 맥을 이어갔다.

그 뒤 1909년에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바뀌었고, 1910년에는 명동중학으로 발전하였으며,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가 설립되어,

북간도 지역 민족교육운동의 본산으로 자리하였다.

아울러 1909년에 명동학교 교무주임 정재면() 등이 김약연 등의 협조를 받아 명동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는 700여 명의 명동촌 남자와 여자가 모여 부흥회를 열 정도로 발전하였다.

명동촌은 명동교회를 통해서 유교 공동체 사회에서 근대 기독교 문화 공동체로 변화하였다.

현재 중국 길림성 용정시정부는 명동촌을 중국 조선족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건설하려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2011년에는 명동학교가 복원되었고, 2012년 8월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의 생가’라는 이름으로 윤동주시인 생가와

명동교회를 포함한 주변 지역이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윤동주전람관’도 신축되었다.

윤동주(尹東柱 1917년12월30일~1945년2월16일)는조선의 독립운동가, 시인, 작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중국 만저우지방 지린성 연변 용정에서 출생하여 명동학교를 수학하였고, 숭실중학교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중학교 때 처음 시를 발표하였고,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유학 후 1942년 도시사대학에 입학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1990년대 후반 이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본명 외에 동주(童柱)와 윤주(尹柱)라는 필명도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