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여행 4국 8박10일(제7일) - 3. 세계문화유산, 꽃의 도시 피렌체 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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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서유럽

서유럽 여행 4국 8박10일(제7일) - 3. 세계문화유산, 꽃의 도시 피렌체 ⑴

by 정산 돌구름 2018. 7. 17.

서유럽 여행 4국 8박10일(제7일) - 3. 세계문화유산, 꽃의 도시 피렌체



 

  - 7일(7월 13, 금) -

안틸레 호텔(ANTILLE HOTEL)  기상 후 산책 ⇨ 호텔 앞 레스토랑 조식  버스 출발 ⇨ 피렌체 관광 ⇨ 로마로 이동 ⇨ 석식 ⇨ 꼬발로 호텔(Hotel Coballo)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꽃의 도시, 피렌체 역사지구

“피렌체에서 깨어나는 일, 햇살 비쳐 드는 객실에서 눈을 뜨는 일은 유쾌했다. ...(중략)...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일, 익숙하지 않은 걸쇠를 푸는 일도, 햇빛 속으로 몸을 내밀고 맞은편의 아름다운 언덕과 나무와

대리석 교회들, 또 저만치 앞쪽에서 아르노강이 강둑에 부딪히며 흘러가는 모습을 보는 일도 유쾌했다.”

영국의 문호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E. M. Forster)는 소설 '전망 좋은 방'에서 피렌체 의 아침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탈리아의 중부에 위치한 피렌체(Firenze)로마 북서쪽 233km, 아르노강()의 양안(), 구릉과 선상지상에 있다.

14~15세기 메디치(Medici) 가문의 후원에 힘입어 르네상스를 꽃 피운 도시다.

근대적인 대도시로서 아르노강 연변의 교통로와 아펜니노 산맥을 넘는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하다.

38만의 인구를 지닌 와인의 본고장인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중심지인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피렌체 역사지구 전체가 1982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영어로는 플로렌스(Florence)라고 한다.

피렌체는 로마와 더불어 이탈리아 관광의 메카라고 불릴 정도로 역사와 문화적으로 중요한 도시다.

세계 예술유산의 많은 부분을 이탈리아가 간직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피렌체는 로마와 함께 엄청난 유산을 보유한 도시다.

피렌체 시의 중심지에는 르네상스시대의 많은 예술작품과 건축물들이 남아 있어 하나의 박물관과 같다.

이것들은 대부분 11세기~16세기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두오모(Duomo) 광장을 중심으로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두오모 성당, 정식명은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과 산지오바니 세례당,

그리고 지오또의 종탑(깜빠닐레)이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걸어서 단테의 생가와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과 베키오 다리, 그리고 미켈란젤로 광장까지 모두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단테,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카치오, 미켈란젤로... 열거하기에도 벅찬 대가들이 피렌체에서 태어나거나 흔적을 남겼던 예술가들이다.

두오모, 우피치 미술관, 산타마리아 노벨라성당, 산 로렌초 성당, 베키오 다리.. 모두가 피렌체 역사지구의 유적들이다.

피렌체 사람들의 도도함은 ‘패션 1번지’ 밀라노와는 또 다르다.

옷깃을 올려 세운 날렵함이 아니더라도 도심 깊숙이에서 풍겨나는 예술향이 그들의 자부심을 부추긴다.

피렌체의 역사는 BC 10세기 무렵의 취락 빌라노바(Villanova)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로서 발전은 BC 2세기부터 시작되었는데, 특히 로마에서부터 뻗어오는 카시아 가도의 중심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당시에 계획적으로 건설된 부분은 현재의 시가 중심부와 일치하며 폰트 베키오(Ponte Vecchio)의 우안()에 해당한다.

제정()시대에는 토스카나·움브리아(Umbria)의 중심이 되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는 백작령()의 중심이 되었으나,

11세기 후반 마틸데(Mathilde)의 시대까지 도시의 발전은 정체()상태였다.

마틸데 사망 후 12세기 전반에 코무네(Comune)로서 독립하고 좌안의 보루고(Borgo) 지역을 병합해서 발전하였다.

12세기 무렵부터 산업, 특히 모직물공업이 발전하여 많은 직물이나 귀금속 상인이 각기 조합을 만들어 경제적으로 번영하였고,

피렌체는 유럽의 상공업·금융업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에 이르러 교황당(Guelf)과 황제당(Ghibelline)과의 싸움이 피렌체뿐만 아니라 전 토스카나 지방, 나아가서

전이탈리아를 휩쓸었으며, 이때 피렌체는 피사 등의 인근도시를 지배하여 강대한 공화국이 되었다.

1300년에 비롯된 교황으로부터의 자립과 신흥상인 계급의 권익을 추구하는 백당(白黨)과 교황 및 귀족계급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흑당(黑黨)은 백당인 단테를 망명하게 하였으나, 이 무렵의 피렌체는 이미 인구 10만을 헤아렸고,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이탈리아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15세기 초부터 메디치(Medici) 가문이 시정()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시모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및 손자인 로렌츠((Lorenzo de Medici)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5세기 말부터 메디치가의 추방과 복귀가 되풀이되었으나 1532년 메디치가의 세습체제가 확립되어 피렌체는 토스카나 공국

수도가 되었다. 이 무렵부터 질병이 유행하고 인구가 감소되어 이탈리아의 다른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도시경제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까지 인구는 10만 이하에 머물렀다.

1859년 토스카나 공국은 사르데냐(Sardegna ) 왕국(뒤의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되었다.

1865년부터 1870년까지는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는 격심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1944년 8월에는 영국·독일의 치열한 공방전의 무대로 참화를 입었다.

상공업이 성하며, 식품·의료·가구 등의 일용품공업 외에 자동차부품·자전거·냉장고·농업기계 등의 제조공업과 전통적으로

이름높은 가죽제품공업이 이루어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시정의 중심이었던 시뇰리아 궁전을 비롯하여,

지금은 국립미술관·도서관·고문서관()이 들어 있는 우피치 궁전, 독특한 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교회,

조토의 벽화 등으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 교회, 도나텔로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산 로렌초 교회 등이 있는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도 같다.
한때 메디치가 저택이었던 팔라초 피티(Palazzo Pitti)는 현재 미술관이고, 그 밖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름높은 아카데미아

미술관, 바르젤로 미술관이라는 통칭으로 알려진 국립미술관,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산마르코 미술관 등이 있다.

또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기관 ·연구기관이 모여 있다.

1966년 가을에 아르노강이 범람, 우피치 궁전 등 시가의 중심부가 침수되어 귀중한 문화재가 큰 손실을 입었다.




피렌체의 상징, 두오모 성당(Duomo, Santa Maria del Fiore)

거리의 중심을 향하면 눈앞의 거대한 건물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능한 한 장엄하게! 더욱 더 화려하게!"라는 말처럼 170여, 엄청난 세월을 거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

두오모는 피렌체 시내 어떤 외진 곳에서도 두오모의 아치형 돔의 일부분이 보일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하다.

성당의 광장에는 관광객을 위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다.

두오모는 1296년에 착공되어 1436년에 완공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꽃의 성모 마리아)'이다.

깜비오(Arnolfo di Cambio)가 설계를 하였고, 106m의 높이를 자랑하는 돔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작으로 1420

착공 후 14년간 이 건축 공사에 종사했으며, 사후 1461년에 완성을 보았다.

대리석 모자이크 장식의 벽체는 장관을 연출하며, 내부는 전성기 고딕 아치형 천정이 아치들로 받쳐져 있다.

관광객들이 직접 돔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이 가능하다.

두오모의 주변에는 볼 것이 굉장히 많다. 두오모 부속미술관(Museo dell'Opera del Duomo)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pieta),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 등의 대성당에 관련된 예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두오모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10년간 헤어졌던 연인의 약속의 공간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피렌체의 정치 중심지였던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

중세 이래로 피렌체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은 오늘날까지도 피렌체 사람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을 모으는 정치적인 연설과 시위의 장소로 남아있다. 광장에는 복제품을 비롯한 많은 예술작품들이 즐비해 있어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다. 곳곳에서 거리의 판토마임이 열리고 있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공화주의의 이상이 명백히 표현된 절대군주의 살해자,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이곳에 있는 것은 복제본이고 원본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다)에서 지암볼로냐(Giambologna)의 기수상의 듀크 코지모(Duke Cosimo) 1세의 초상화식 동상(1594)과 사비니 여인의 강간(또는 강탈)까지 이곳에 있는 건축물에서 신화와 과거의 정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광장 중앙에는 넵튠 분수가 있고 종교개혁을 주도하다 처형된 사보나롤라의 처형지라는 표식인 화강암도 보이며, 한쪽으로는 베키오 궁전이 보인다.

최근 광장 밑에서의 발굴로 인해 중세의 건물뿐만 아니라 1세기의 로마 건축양식도 있음이 알려졌다.


단테의 생가(Dante's Birthplace)

두오모 성당에서 시뇨리아 광장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에 초라한 단테의 생가가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 거리(Via. Dante Alighieri)에 있으며, 13세기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생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벽에 붙어있는 단테의 토르소가 전부이다.

그가 이탈리아에 남긴 유산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현재는 미술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Boucies D'or(Goldilocks) / Djel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