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여행 4국 8박10일(제5일) - 5. 이탈리아 경제중심지, 밀라노(Mil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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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서유럽

서유럽 여행 4국 8박10일(제5일) - 5. 이탈리아 경제중심지, 밀라노(Milano)

by 정산 돌구름 2018. 7. 17.


서유럽 여행 4국 8박10일(제5일) - 5. 이탈리아 경제중심지, 밀라노(Milano)


 

 

  - 5일(7월 11, 수) -

기상 후 인근 산책 ⇨ 인터라켄 빌더스빌(Wilderswil)역 출발(열차에서 도시락 조식) ⇨ 융플라우요흐 ⇨인터라켄 ⇨ 버스 이동 ⇨ 밀라노 ⇨ 밀라노 관광(두우모,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스칼라극장) ⇨ Ibis Styles East Milan Settala Hotel


 

찬란한 고대 문화유산, 이탈리아(The Italian Republic)

정식 국호는 이탈리아공화국(Republica Italiana, Italian Republic)이며, 수도는 로마(Rome)이다.

면적 301,340(세계 72CIA기준), 인구 62,137,802(세계 232017.07.est.CIA기준)이며, 대부분이 이탈리아인이다.

언어는 이탈리아어이며, 종교는 99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한다.

기후는 알프스와 접한 북부 일부 지역은 겨울에 대륙성기후를 보이나 그 밖의 대부분 지역은 전형적인 지중해성기후를 보인다.

이탈리아는 BC 7세기경 이 지역에 살았던 그리스인이나 에트루리아(Etruria)인의 세계까지 올라가지만 로마에 의한 역사는

이탈리아반도의 통일 시기인 BC 270년경부터이다.

고대 로마제국은 대제국을 형성하면서 번영을 누렸으나 395년 동서로 분열되었으며, 동로마제국의 멸망에 이어 476년 서로마

제국도 멸망하였다.

그 뒤 중세 교황시대에는 동방무역으로 여러 도시가 번영했으나, ‘신대륙의 발견이후 16세기부터는 주위의 여러 세력에 의해

반도가 분열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침체되었다.

그 후 19세기 초엽에 분열되었던 도시국가들이 사르디니아(Sardinia) 왕국에 병합되면서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아직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북동부와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를 제외하고 이탈리아의 통일이 대체로 달성되어 1861317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수도는 처음에 토리노, 뒤에 피렌체로 옮겨졌다가 1870년 로마 점령에 이어 1871년 로마를 수도로 정했다.

이탈리아 왕국은 체제상으로는 입헌군주제였으며, 1913년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1차세계대전 후 사회주의 세력이 나타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등장, 1929년 무솔리니(Mussolini)에 의한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성립되었다.

2차세계대전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패함으로써 19466월 총선이 실시되었으며, 새 헌법에 의한 공화제가 19481월부터

출범하였다. 195512월 유엔에 가입했으며, 정체는 공화제이다.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이며, 대의기구는 양원제로 국가원수인 대통령은 양원과 각 주의 대표자로 이루어진 회의에서 선출된다.

그 동안 정국을 주도해 온 주요 정당은 기독민주당·공산당·사회당·공화당·민주사회당·자유당·신파시스트당이며,

이들 당은 신파시스트당을 제외하고는 반파시스트운동에 뿌리를 두고 형성, 발전되었다. 1970년대부터 정계가 개편되어 새로운

정당들이 등장했는데, 그들 중 대표적인 것은 올리브연합·공산재건·북부동맹·자유동맹 등이다.

1950년대까지는 전통적인 농업국가로 알려졌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오늘날 서방 5대 선진국이라고

불릴 만큼 공업국가로 변모되었다. 2015년의 국민총생산은 21443억 달러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34960달러이다.

2015년의 무역은 수출 5214억 달러, 수입 4511억 달러를 보이고 있다.

문화적으로도 고대 이래 찬란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도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예술분야에서 선진적인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의 경제적인 중심지 밀라노(Milano)

해발 122m의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주도로 예로부터 경제의 중심지로 현재도 19세기 후반에 발전하기 시작한 근대공업으로

북이탈리아 공업지대의 중심도시로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우리에게 밀라노 패션쇼로 익숙한 이태리 경제, 패션의 메카 밀라노는 패션뿐 아니라 음식, 오페라,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두오모

성당과 유럽 오페라의 중심인 스칼라 극장,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로 유명하다.

밀라노의 중심가는 두오모 광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거리로 일컬어지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Galleria

Vittorio Emanuele II)와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거대한 아케이드로 전통있는 유명한 카페와 부티끄가 줄지어 있다. 이곳에서는 또한 연중 수많은 전시회가 열린다.

밀라노를 여행하기에는 4, 5, 6, 9, 10월이 가장 좋다. 이 기간에는 일반적으로 너무 덥지 않은 쾌적한 날씨를 보인다.

가장 더운 때는 7, 8월로 햇볕이 무척 뜨겁다. 겨울날씨는 보통 온화하지만 일부 지역은 비가 자주 내리기도 한다.

이태리를 여행할 때는 8월은 피하는 것이 좋다. 날씨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이태리인들이 휴가를 즐기러 떠나는 기간이며,

815일에는 로마와 밀라노의 많은 레스토랑과 쇼핑점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는 현지인들보다 관광객이 더 많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면 좋다.

[빠른 시간내에 밀라노를 둘러보려면]

유럽 경제 시장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밀라노는 많은 경제인들이 방문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밀라노에서 관광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는 사람이 드물다.

짧은 시간에 핵심적으로 유명 명소를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밀라노의 자랑인 세계적인 성당 두오모를 관람하여야 한다.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이용하여 옥상으로 올라가면 알프스 산맥까지 볼 수 있어 하나의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두오모를 나와 향해야 할곳은 오페라의 명소인 라스칼라 극장이다.

세계적인 거장들이 아직까지도 공연을 하고 있는 곳이지만 공연을 볼 시간이 없다면 극장옆에 있는 스칼라 극장 박물관에서

오페라의 지나온 역사를 관람하는 것 또한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1466년 브라만테, 다빈치 등이 참여하여 완공한 스포르체스코 성까지 둘러본다면 밀라노의 대부분의 명소를 둘러본 것이다.

 

세계적인 오페라의 메카,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

1778년에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1946년에 재건되었다.

19C 이후로 푸치니, 로시니, 베르니 등 세계적인 오페라 작곡가들의 작품이 초연되었다.

심플한 외관과 대조적으로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내부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으며 화려한 샹들리에가 늘어져 있어 더욱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오페라 시즌은 12월 초부터 이듬해 7월초까지이며, 9월부터 11월까지는 콘서트나 발레가 공연된다.

또한 극장 건물 내에는 스칼라극장 박물관이 있어서 오페라에 관련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관람이 가능하나 유료이다.

음악가들이 애용했던 유품이나 자료들을 볼 수 있다.

티켓 판매소는 12:00~18:00까지이며, 공휴일은 휴무이다.

또한 스칼라극장의 박물관은 09:00~12:00, 14:00~17:00 이며 매주 월요일마다 휴무이다.

스칼라극장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오페라 극장이다.

원래 있던 '레지오 두칼레 극장(Teatro Regio Ducale)'1776년에 화재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새로 지은 극장이다.

건축이 이뤄지기까지 사라진 극장에 박스석을 가지고 있던 밀라노의 상류층은 페르디난드 대공에게 극장을 지어달라고 간곡한

요청을 했다. 뿐만 아니라 건축비용은 곧 지어질 극장의 박스석을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했다.

이것을 통해서도 오페라에 대한 이탈리아인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지어진 극장은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를 허물고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의 이름인 스칼라 극장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1778년에 'Nuovo Regio Ducale Teatro alla Scala'로 개관한 후에는 수많은 오페라의 초연이 스칼라 극장의 무대에 섰다.

특히 푸치니, 베르디, 벨리니, 도니체티의 명작을 세계 최초로 공연한 곳이 바로 스칼라 극장이다. 현재는 오페라 극장으로서의

명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발레와 콘서트 등도 공연하고 있다.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오페라 공연은 보지 못하더라도 박물관을 구경하는 것은 적지 않은 감동을 제공한다.

내부에는 푸치니, 토스카니니, 마스카니 등의 흉상과 더불어 실제 착용했던 의상, 도서자료, 미술품 등 오페라의 역사나 다름없는

스칼라 극장의 역사가 담겨 있다. 

라 스칼라(La Scal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밀라노의 스칼라극장(Teatro alla Scala)은 세계 오페라인들의 영원한 메카이다.

오페라 애호가들로서 라 스칼라를 순례하는 것은 마치 기독교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 스칼라는 모든 오페라 예술가들의 등용문이다.

지난 세기에 수많은 오페라 성악가들이 라 스칼라를 통하여 세계적인 디바(Diva)와 디보(Divo)로서 발 돋음 하였다.

수많은 작곡가와 지휘자들이 라 스칼라를 통하여 출세하였다.

라 스칼라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오페라-발레 극장에 불과하지만 오페라극장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애국정신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극장에서 초연된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와 가면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이었다.

라 스칼라는 2차대전중인 1943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전쟁 이후 이탈리아정부와 밀라노시는 파괴된 밀라노를 재건할 때에 모든 것에 우선하여 라 스칼라의 재건부터 전념하였다.

밀라노의 전시민이 힘을 합쳤으며 나아가 이탈리아 전 국민들의 성원을 입은 재건이었다.

복구는 신속하여서 라 스칼라는 2차 대전이 끝난 이듬해에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사람들은 라 스칼라의 재건을 참혹한 전쟁과 무솔리니 정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으로 승화시켰다.

라 스칼라의 전신은 레지오 두칼레 극장(Teatro Regio Ducale)으로 밀라노공국의 공식극장으로서 사용되었던 곳이다.

레지오 두칼레 극장은 1776년 화재가 일어나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카니발이 끝나는 날 뜻하지 않은 화재가 일어났던 것이다.

밀라노공국의 90명 부호들은 당시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극장 신축을 신청했다.

당시 밀리노공국을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승인하였다.

당대의 건축가 주세페 피에르마리니(Giuseppe Piermarini)에게 새로운 오페라 극장의 설계가 맡겨졌다.

불이 났던 종전의 레지오 두칼레 극장은 협소하므로 기왕이면 가까운 곳에 대지를 마련하여 규모가 큰 극장을 새로 짓도록 했다.

밀라노시는 레지오 두칼레 극장의 인근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라는 오래된 성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스칼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어에서 스칼라라는 단어는 사다리를 말한다.

야곱이 하늘로부터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천사들과 밤새 씨름하였다는 바로 그 사다리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778년 새로운 모습의 극장이 문을 열게 되었다. 이탈라이에서 가장 넓은 무대를 가진 극장이었다

좌석수도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많은 3,000이었다.

참으로 신통한 것은 1층 객석에는 의자를 두지 않고 모두 서서 관람토록 설계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피트도 무대 아래에 마련되지 않고 무대 앞에 자리 잡도록 되어 있었다. 그건 당시의 관습이었다.

1층과 박스들은 돈 많은 사람들의 차지였다. 돈 없는 사람들은 천정에 가까운 꼭대기에서 관람해야 했다.

이를 로지오네(Loggione: Loge)라고 불렀다.

그러나 돈 없는 서민들은 꼭대기의 로지오네나 갤러리에 올라가 관람하면서도 마음은 풍요로웠다.

돈 많은 부자들이나 권세있는 귀족들보다 천국에 가깝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의 갤러리라는 단어는 천국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한가지 웃기는 것은 라 스칼라의 회랑(Foyer)이 상당기간 도박장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오페라를 관람하다가 심심하면 나와서 돈내기 도박도 할수 있는 것이 당시 오페라극장에서의 관습이었다.

물론 도박만 전문으로 하기 위해 오페라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새로 지은 극장은 처음에 신레지오두칼레극장(Nuovo Teatro Regio Ducale)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얼마후부터 테아트로 알라 스칼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라 스칼라의 외관은 유럽의 내노라하는 다른 오페라 하우스에 비해 상당히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바닥도 대리석이 아닌 평범한 화감암을 사용했다.

멋을 부린 곳은 현관쪽의 단단한 석재 기둥, 그리고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설계한 창문 정도이다.

불이 나더라도 다시는 전소되지 않도록 한다는 생각으로 돌을 써서 단단히 지은 것이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상당히 화려하다. 붉은 색과 황금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내부였다.

그랜드 오프닝 기념 공연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L'Europa Riconsciuta(모습을 드러낸 에우로파)이라는 작품이었다.

아제노레(Agenore)왕국의 에우로페(Europe) 공주에 대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합스부르크가 유럽중심이 되어 유럽을 계몽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오페라였다. 그로부터 라 스칼라는 1943년 전쟁 중에 폭격으로 파손되기까지 무려 167년동안 유럽 오페라의 중심역할을 하며 당당하게 버텨왔다.

2차대전으로 파손된 라 스칼라는 그 옛날 화재로 손상되자 시당국과 시유지들이 발벗고 나서서 재건하였던 것 처럼 모두 손을

걷어 부치고 복구에 전념하였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1946년 초의 재개관 기념음악회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었다.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의 독창회였다.

테발디가 세계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 인정받은 음악회였다.

라 스칼라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진 작품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베르디의 나부코, 돈 카를로, 오텔로, 활슈타프 등등! 실로 베르디는 라 스칼라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베르디는 한때 그의 오페라를 라 스칼라에서 공연하는 것을 거부한 일이 있다.

오케스트라가 제멋대로 음악을 고쳐서 연주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때에 베르디는 자기의 음악이 라 스칼라의 오케스트라 때문에 부패해졌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베르디는 1874년 그의 '진혼곡'(레퀴엠)의 초연을 직접 지휘하여 라 스칼라와의 불편한 관계를 마감했다.

베르디로서도 라 스칼라를 떠나서는 살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베르디는 나아가 1886년 오텔로를 라 스칼라에서 초연토록 양해했다.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인 활슈타프도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푸치니의 투란도트도 라 스칼라에서 세계 초연되었다.

라 스칼라는 20029월부터 200411월까지 새단장을 위해 휴관하였다. 무대가 완전히 새롭게 보수되었다.

새단장한 라 스칼라의 기념공연은 그 옛날을 기억하여서 살리에리의 '모습을 드러낸 에우로파'(L'Europa riconosciuta)였다.

라 스칼라는 오늘도 세계 오페라인들이 메카로서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밀라노 두오모(Duomo di Milano)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이며 이탈리아 고딕 건축의 정수인 두오모 대성당은 2245개의 거대한 조각군으로 장식되어 있고

135개의 첨탑이 하늘로 치솟아 있다.

길이 157m, 높이 108.5m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런던의 세인트 폴(St. Paul's Cathedral), 독일의

쾰른 대성당(Cologne Cathedral)에 이어 4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가장 높은 첨탑에는 도시를 수호하는 황금의 마리아 상이 세워져 있다.

1386년 밀라노의 영주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Gian Galeazzo Visconti)의 의견에 따라 대주교 안토니오 디 사루초(Antonio Di

Saluzzo)가 기공하였다.

프랑스나 독일의 대성당에 필적할 만한 것을 조영하기 위해 본국 외에 독일과 프랑스의 건축가를 참가시켰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성당 건축 가운데 알프스 이북의 고딕적 요소가 가장 농후하다.

반면에 설계와 시공에 관한 의견 조정이 지극히 어려워 1577년에야 헌당되었으며, 부대공사 모두가 완료된 것은 1951년이었다.

450년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어 19C에 완공되었다.

내부는 5랑식(廊式) 본당, 3랑식 익랑(翼廊), 주보랑(周步廊)이 달린 본전(本殿)으로 되어 있으며, 천장은 측랑(側廊)에서 신랑

(身廊)에 걸쳐 계단 모양으로 높아지고 있다. 외부 벽면은 대소의 부벽(扶壁)과 번잡할 정도로 많은 소첨탑(小尖塔)으로 장식되어

얼핏 보아 지극히 호화로워 보이나 통일감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두오모 성당 정면 앞쪽으로 두오모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시내 중심에 있는 이 광장을 축으로 1~2km 안에 관광지가 집중되어

있다. 이 광장은 시당국의 계획으로 1862년 건축가 주세페 멘고니(Giuseppe Mengoni)가 조성했다.

중앙에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Vittorio Emanuele II)의 기념 동상이 서 있고, 밀라노 시민의 휴식 장소로 애용된다.

 

밀라노 쇼핑의 중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Galleria Vittorio Emanuele II)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쇼핑몰로서 1865년에서 1877년 완공되어 이탈리아가 통일되던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다.

과거에 이 갤러리아 자리는 정치인들이 회합하는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이 아케이드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기념하는 건축물 중에서 대표적인 건물 중의 하나이다.

현재도 이 갤러리아는 유럽 3대 갤러리아 중의 하나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밀라노 중심의 두 축인 두오모 광장과 스칼라 광장을 잇고 있는 대형 회랑(Arcade)이다.

지금의 이름은 이탈리아 왕국(Kingdom of Itlay)에서 최초로 왕에 올랐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따른 것이다.

주세페 멘고니(Giuseppe Mengoni)19세기 중반에 유럽에서 유행하던 디자인을 따라 설계했다.

오픈은 이른 시기에 했으나 최종적인 완성은 1878년 무렵이었다.

대형 유리지붕이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의 중심에서는 모두 4개의 거리가 모인다.

각 거리에는 토즈(Tod's), 프라다(PRADA), 구찌(GUCCI), 루이비통(LOUIS VUITTON)과 같은 명품 브랜드와 고급 카페 그리고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어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도 쇼핑의 중심으로 불린다.

프라다의 역사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쇼핑몰과 쇼핑가에서 'Galleria'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패션 브랜드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보통 10시부터 19시까지 영업하는 편이며, 일요일은 쉬거나 늦게 문을 여는 매장도 있다.

밀라노의 중심, 두오모에 서서 스칼라 극장 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복합상가의 아케이드 지붕이 밀라노의 하늘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갤러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의 거리로 불리고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이 복합 건축물은 현대 서울에서 유행하는 쇼핑몰을 무려 130년 전에 이미 구현한 곳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유럽 3대 갤러리아, 밀라노의 응접실이다.

과거에 이 갤러리아 자리는 정치인들이 회합하는 건물이 있던 곳이었다.

갤러리아 건물은 1865년에서 1877년 사이에 지어졌으니 이탈리아가 통일되던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아케이드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기념하는 건축물 중에서 대표적인 건물 중의 하나이다.

현재도 이 갤러리아는 유럽 3대 갤러리아 중의 하나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갤러리아는 밀라노 중심의 두 축인 두오모 광장과 스칼라 극장 앞의 광장을 이어주고 있다.

갤러리아는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가게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내부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 천장 높은 갤러리아 내부에는 전통의 노천카페와 레스토랑, 서점, 벤츠 멀티샵, 부띠끄와 함께 프라다의 본사 같은 명품

브랜드 가게들이 한 공간씩 들어서 있다. 판매가격은 착하지 않은 편이라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곳의 화려한 거리와 가게들의

유행과 패션이 지구의 스타일을 선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