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먼곳에 / 김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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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mic/가요

님은 먼곳에 / 김추자

by 정산 돌구름 2011. 1. 13.

 

님은 먼곳에  / 김추자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것을 /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주고 눈물주고 꿈도주고 / 멀어져갔네 님은 먼곳에 / 영원히 먼곳에 망설이다가 / 님은 먼곳에
마음주고 눈물주고 꿈도주고 / 멀어져갔네 님은 먼 곳에 / 영원히 영원히 먼 곳에
님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 망설이다가 가버린사람

 


 


1970년대는 <민족문화 중흥>의 기치 아래 <외래 퇴폐풍조 단속>을 선언한 정책 아래 남성의 머리카락 길이와

여성의 치마 길이까지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음악계가 무사할 리는 없었다.

1969년 시작된 <전국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1971년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렸고, 그 에너지는 지하의 <고고클럽>으로 숨어들었다.

이런 지하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던 사람들에게 1970년대 초반 주류 대중연예계는 <대형 슈퍼스타들의 라이벌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남성 가수의 경우는 남진과 나훈아가 <오빠부대>라고 할 만한 팬 층을 거느리고 용호상박의 라이벌전을 펼쳤다.

남진의 팬을 자처하는 이가 나훈아에게 병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는 등 때로는 험악한 사건도 발생했다.

여성가수의 경우도 김추자와 김세레나 사이에 자존심 싸움이 벌어진 일이 있다.

이들의 주요무대는 아직 음반이나 방송보다는 극장에서의 <쇼> 혹은 <리사이틀>이었다.

서울 시민회관을 비롯한 대도시의 극장들에서는 가수의 이름을 타이틀에 건 <리사이틀>이 성황리에 전개된 것이다.

당시의 업계 용어로 <아다마 가수> 즉 으뜸 가수라고 불렀던 이들 대형가수들은 흥행의 보증수표였고,

이들의 쇼는 추석이나 설 같은 연중 대목을 장식했다.

흥미로웠던 것은 이들 스타들 사이의 라이벌전만큼이나 팬들의 극성스럽고 능동적인 모습이었다.

사소한 데 목숨 거는 팬덤현상은 도시화에 따라 대중연예의 새로운 형식이 그만큼 절실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벌이라는 상징작용을 통해 <경쟁을 통해 승리해야 한다.>는 의식을 대중의 신체에 깊이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이들 스타는 무대 위나 무대 뒤에서의 각종 사고나 스캔들로 연예계의 가십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최고의 대중스타로 김추자를 뽑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는 주류 연예계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분고분한 연예인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특이한 존재였다.

하체가 꽉 끼어서 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는 나팔바지(판탈롱)와 민소매를 즐겨 입은 차림으로 손과 발을 휘저으면서

육감적인 춤을 추는 모습은 그 자체 하나의 사건이었다.

비음 섞인 창법은 솔이라는 외래풍조를 기초로 토속적 감각을 가미한 독창적인 것이었다.

정상에 등극할 때까지 그의 배후에 신중현의 작사와 작곡, 그리고 그의 그룹 덩키스, 퀘션스의 연주가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남진, 나훈아, 김세레나 등 1970년대초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들이 대체로 재래가요의 문법에 충실했던 반면,

김추자의 경우 외래가요인 팝과 재래가요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다.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 <꽃잎> 등의 가요들은 지하에서 그룹사운드들이 연주하던 <광란의 솔, 싸이키델릭 사운드>를 지상에서 뾰족하게 대표했다.

그의 존재가 흥미로웠던 것은 무대 위뿐만 아니라 무대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연조건이 맞지 않으면 <펑크>를 서슴지 않았고, 주간지에서는 <노팬티설>, <열애설>, <임신설>, <간첩설>에 이르기까지

그를 둘러싼 풍문이 끊이질 않았다. 이 가운데 <간첩설>에는 또 다른 루머가 전해 내려온다.

1971년 7월 부산에서 열린 한 리사이틀에서 그가 김세레나와 머리를 잡고 싸운 끝에 가수협회로부터 3개월 자격정지를 당하자

그의 매니저 소윤석이 무대복귀를 위해 연출한 <언론 플레이>라는 루머다.

자격정지에서 풀린 뒤 그에게 악몽 같은 <스캔들>은 발생했는데, 마침내 1971년12월의 리사이틀 무대에서 김추자의 분신과도 같았던

소윤석이 휘두른 술병에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 뒤로 그는 재기에 성공했지만 1975년12월 다시 한번 시련을 맞이한 뒤 점차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슈퍼스타의 굵고 짧은 5년이었다. 1975년12월이란 이른바 대마초 파동이 일어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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