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금오산 약사암과 마애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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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금오산 약사암과 마애여래입상

by 정산 돌구름 2024. 6. 8.

구미 금오산 약사암과 마애석불입상


2024년 6월 7일, 구미 금오산 산행길에 찾은 약사암과 마애석불입상..

경북 구미시 남통동 금오산 정상에 자리한 약사암(藥師庵)은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당시의 유적은 전하는 것이 없으며, 현존하는 당우도 모두 근세에 이루어진 것이다.

약사암의 중심 전각은 약사전인데 기암절벽 밑에 남향하여 건립되어 있으며 북쪽의 소봉상 아래도 남향한 요사 1동이 지어져 있다.

요사 좌측으로 300미터 지점의 바위에는 보살 입상(보물)이 선각되어 있다.

약사전 안에 봉안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은 수도산 수도암, 황악산 삼성암의 약사불과 함께 3형제 불상이라고 불리며 세 불상이 함께 방광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절의 동쪽 암벽에는 약수가 용출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구멍에서 쌀알이 하나씩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약사암은 옛날부터 참선도량으로 유명해서 오늘날까지 수행승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약사전중수기」에 의하면 지리산에 삼불(三佛)이 있어서 금산 삼성암(三省庵), 성주 수도암(修道庵)과 구미 약사암에 나누어 봉안했다 하는데 도인 박유술(朴有述)이 불상을 만들고 지리산에 와서 석봉대(石峯臺) 아래서 쉬고 있을 때 홀연히 불상이 땅에 정좌하여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암자를 세웠다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사인(士人) 우상학(禹象學)이 중수하였다.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개금이 두텁게 되어 있어 원상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나 재질은 화강암으로 짐작되며, 1960년대의 개금하기 전 사진에 의하면 원만한 상호에 완전한 형태의 석가여래상임을 알 수 있다.

크기는 높이 95㎝, 어깨 너비 45㎝, 무릎 폭 67㎝이다.

불신에 비해 불두가 큰 편이고 머리의 나발(螺髮)도 굵직한데 육계(肉髻)가 넓어 머리와 구분이 모호하다.
상호는 방형이며 가늘게 뜬 눈이나 콧망울, 너비로 잡은 입술이 작게 표현되었으나 비교적 원만한 편이고, 백호는 수정을 감입하였다.

통견(通肩)으로 걸친 옷자락은 수직으로 내려오고 있고, 가슴에는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내의를 입었다.

불신의 조각은 다소 평면성을 띠는데 측면에서 보는 불상의 너비가 좁고 결가부좌한 다리도 폭이 좁아졌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觸地印)이고 왼손에는 작은 약호(藥壺)를 들었으나 약호는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보물 제296호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설명문에 “금오산 약사암에 있는 석불, 직지사 약사전의 석불과 함께 3형제라 하고 그 중 한 석불이 하품을 하면 다른 두 석불은 따라서 재채기를 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신라 말기, 혹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영남 지역의 석불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2005년 3월 14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362호로 지정되었다.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해발 약 800m 지점에서 남쪽으로 꺾어 암벽을 안고 돌아가 300~400m 지점에 이르면 약사암이 바라다보이는 곳 동쪽으로 제법 넓직한 대지가 나오고, 기와 조각들이 주변에 산재한 보봉사지가 있다.

“보봉사(普峰寺)가 보봉 아래 있어 동으로 수백 리의 통망(通望)이 좋더라”라는 기록대로 보봉사의 구지로 추정된다.

구미 금오산 마애여래입상은 그 뒤편에 깎아지른 듯한 자연 암벽의 바위 모서리를 이용하여 조각한 특이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1968년12월19일 보물 제490호로 지정되었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전체 높이 5.5m, 입상 높이 4.2m, 대좌 높이 0.5m이다.

머리에는 삼면보관(三面寶冠)이 있지만 마멸 때문에 조식(彫飾)은 확실히 알 수 없다.

얼굴은 갸름하고 풍만하며 긴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초승달 모양의 눈썹은 작고 오뚝한 콧잔등으로 이어져 있다.

코밑에는 길게 표현된 인중과 함께 입술을 가늘게 조각하여 다소 경직되고 근엄한 인상을 풍긴다.

눈, 코, 입 등은 원만상으로 처리되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며 목의 삼도(三道)는 명확하지만 목이 짧아 가슴까지 내려와 형식적이다.

몸은 약간 왼쪽으로 꺾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윤곽은 부조(浮彫)가 뚜렷하지만 세부적인 신체의 굴곡은 생략되어 있다.
신체는 넓고 둥근 어깨에 가슴은 다소 평판적이며, 크게 묘사된 두 손은 오른손을 수직으로 내려 천의 자락을 쥐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이 보이도록 팔을 굽혀 바깥쪽으로 내밀었다.

어깨의 선도 원만하고 꺾은 자세도 적당하지만 가슴이나 팔, 하체의 처리 등은 둔화되고 경화되었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내장(內掌)하였으며, 왼손은 팔꿈치를 약간 굽힌 외장한 자세로 천의(天衣) 자락을 잡고 있다.

발은 직립하고 있고, 발가락은 아주 큼직하게 조각하였다.

착의법은 천의를 왼쪽 어깨에서 걸쳐 입어 오른쪽 어깨가 노출되도록 하여 여래상에서 나타나는 우견편단(右肩偏袒)과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가슴에 밀집되어 평행선으로 표현된 의습선은 하반신에 이르러 허리에서 무릎 밑까지 완만한 반원형 주름을 규칙적으로 반복시키고, 중앙에 깊은 홈을 새겨 두 다리의 윤곽을 표현하였다.

양팔에서 내려온 옷자락은 모두 묵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두(頭), 신광(身光) 모두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신광은 보주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문양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대좌는 입상을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부각(浮刻)하였는데 11엽(葉)의 단판 연화문(單瓣蓮華文)이 표현되었으며, 각 판 안에는 화문(花文)이 장식되었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암벽의 모서리에 조각되어 있는데 상(像)의 중심선이 모서리여서 양쪽 암벽에다 조각된 특이한 구도를 보여준다.

머리에 쓴 보관의 흔적과 높게 틀어올린 육계 이외에는 거의 여래형에 가까운 상으로, 머리 뒤에는 3중의 보주형 두광을 조각하고, 다시 두광에서 이어져 내린 2중의 선으로 신광을 표현하였다.
대좌는 보살상을 중심으로 꺾인 바위 면을 따라 11엽의 복련(伏蓮)을 두르고 연잎 안에는 다시 화판 장식을 뚜렷하게 새겨넣었다.

전반적으로 장대한 신체에 강한 부조로 조각되었지만 얼굴의 표현이 경직되어 있고, 하반신의 표현이 다소 둔해지는 고려불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어 제작 시기는 10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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