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일, 토요일 용화산 둘레길을 거닐다..
용화산 둘레길은 총 7km로, 제1코스(서동공원~대나무숲길, 2km)는 용화세상 여는길, 제2코스(대나무숲길~편백나무쉼터,
1.9km)는 소세양 신도비길, 3코스(편백나무쉼터~가람 이병기 생가터)는 장보러가는 길이다.
이 길은 백제의 중흥을 이끈 제30대 국왕 서동(薯童), 조선 문신이자 명기인 황진이가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소세양(蘇世讓),
근대 시조문학 선구자인 국어학자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선생 등 시대를 대표하는 익산출신 인물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용화산은 둘레길로 형성돼 있어 가람 이병기 생가, 두동 편백나무 숲 등 다양한 곳에서 오를 수 있다.
2009년부터 백제의 숨결 익산둘레길을 테마로 조성하기 시작한 익산의 둘레길은 2011년 미륵산길, 성당포구 길, 용화산길
3개 코스 35km를 추가하여 총 6개 코스 99km를 완성하였다..
제1코스(서동공원~대나무숲길, 2km)는 용화세상 여는길..
백제 중흥의 꿈이 꿈틀대던 익산의 대표공원, 서동공원,
서동(薯童)은 백제 무왕(600~641)의 어릴 때 이름이고 선화공주는 진평왕(재위 579~632)의 셋째 딸이라고 하여,
시간적 배경을 6세기 말~7세기 초로 설정하였다.
백제의 수도 남쪽 못 가에 사는 과부가 못의 용과 통정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마[薯蕷]를 캐어 팔았으므로 서동이라고 불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선화공주가 천하 미인이라는 말을 듣고 중의 행색으로 서라벌에 가 거리 아이들에게 마를 주어 친해졌다.
노래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가 궁중에 들어가 신하들이 공주를 귀양 보내도록 간하였다.
귀양지로 가는 도중 서동이 나타나 같이 가다가 정을 통했으니 그제야 노래의 징험을 알게 되었다.
함께 백제로 간 뒤 공주가 떠나올 때 왕후가 준 금을 꺼내 놓으니 서동은 마를 캐던 곳에 쌓여 있는 게 그것이라고 하였다.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知命)법사에게 부탁해 금을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옮겨 놓았다.
이로써 서동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사자사로 가던 중 용화산의 큰 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왔다.
부인이 그곳에 큰 절을 세우기를 발원하니 왕이 허락하여 미륵사를 창건했는데 진평왕이 기술자들을 보내어 도왔다..
철쭉이 활짝 핀 주차장에서 둘레길은 시작된다..
한국 최초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인 서동요(薯童謠)..
백제의 서동(薯童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민요 형식의 노래이다.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說話)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전한다.
즉, 무왕이 어릴 때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머리를 깎고 중처럼 차려
신라 서울에 와서 마[薯]를 가지고 성 안의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며 이 노래를 지어 그들에게 부르도록 하였다.
선화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 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서동공원에서 시작되는 용화산 둘레길 1코스..
1코스는 서동공원~대나무숲길로 이어지는 2km구간으로 <용화세상 여는길>로 불린다.
용화세상이란 불교의 가르침중 미래에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한량없는 중생을 해탈시키는 시대를 말한다고 한다.
1코스 대나무숲길 방향으로 들어서면..
미륵산둘레길 표지목이 있다..
민들레가 아름다움을 더한다...
개울가 농로를 따라가면..
붉게 핀 꽃길..
마을속의 조그만 사찰, 용문사가 바라보인다..
도로에 나서면 둘레길 안내표지목이 서있다..
과수원길로 이어져..
밭둑 오솔길을 따라가면..
숲속으로 들어서..
호젓한 산길을 따라간다..
다시 도로와 합류하여..
시멘트길을 따라간다..
좌측에 대나무 숲길..
아래로는 조그만 금곡저수지..
길은 산허리로 이어지고..
등산로 갈림길에서 대나무숲길로 이어간다..
산속으로 들어서면 호젓한 오솔길..
아름다운 꽃도 만발하였다..
녹음이 짙어가는 5월을 만끽하며..
잠시 산속에서 나와 다시 농로를 따라간다..
등산로 갈림길..
조그만 둠벙 옆을 지나면..
소세양신도비 갈림길..
좌측 대나무 숲으로 이어지지만 소세양신도비를 보기 위해 직진한다..
다시 신도비 갈림길 삼거리..
100m가량 내려서면 양곡 소세양신도비가 있는 진주소씨 제각이 나타난다..
진주소씨 제각인 화산재(華山齋)..
제각 담장 안에는 철쭉이 만발하고..
신도비를 오르면서 뒤돌아본 제각..
소세양신도비(蘇世讓神道碑)..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 있으며, 전북유형문화재 제159호(1998년1월9일)로 지정되었다.
1564년(명종 19년)에 건립되었고, 비신(碑身)은 높이가 218㎝, 너비가 103㎝, 두께가 25㎝의 대리석으로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세우고 옥개석을 얹었다.
대석은 가로196㎝, 세로112㎝, 높이90㎝ 크기로 전,후면은 3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을, 양측면에는 2개의 정사각형안에
국화문을 조각하였다. 현재의 옥개석은 원래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이수가 파괴되어 도괴의 위험이 따르므로 교체한 것이다.
비의 전액(篆額)은 글씨 크기가 약 12㎝이며, 심전(沈銓)이 전서(篆書)하였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楷書)로 홍섬(洪暹:1504~85)이 썼고, 비명은 크기가 약 2㎝로 소세양의 아들 수(遂)가 썼다.
소세양(蘇世讓)은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퇴재(退齋)·퇴휴당(退休堂),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504년(연산군 10년) 진사에 이어 1509년(중종 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다.
정언(正言)을 거쳐 수찬(修撰) 때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에 이장하게 했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후에 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다.
1521년 영접사(迎接使) 이행(李荇)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王子師傅)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었으며,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때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형조·호조·병조·이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
1538년 성주사고(星州史庫)가 불타자 왕명에 따라 춘추관(春秋館)의 실록(實錄)을 등사, 봉안했다.
1545년(인종 1년) 윤임(尹任)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 명종이 즉위한 뒤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
(左贊成)을 지내다가 사직, 익산(益山)에 은퇴했다.
문명이 높고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를 잘 썼다. 익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양곡문집(陽谷文集)>, 글씨에 <임참찬권비(任參贊權碑)>(楊州) <소세량부인묘갈(蘇世良夫人墓碣)>이 있다..
신도비 묘역에서 바라본 신탄마을과 용화저수지...
다시 제각으로 내려선다...
2코스(대나무숲길~편백나무쉼터 1.9km)는 소세양 신도비길..
도로를 따라 오던 길로 올라서 2코스를 시작한다..
농로를 따라가면 대나무숲길에서 편백나무 숲길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
2코스는 대나무숲길~편백나무쉼터의 1.9km로 소세양 신도비길이라고 한다..
편백나무쉼터 방향으로 들어서면 널따란 산길이 이어지고..
길가에는 아름다운 야생화가 만발하였다..
산길을 벗어나면 다시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앞으로 들어서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집을 지나..
자목련이 활짝 핀 신사마을에 이른다..
신사마을을 지나 좌측 숲길로 들어서야 하나 농로를 따라 500m가량 지나간다..
길을 잘못 들었음을 인지하고 다시 돌아온다..
신사마을 끝 이정표까지 돌아와 좌측 숲속으로 들어선다.
이 이정표 앞에서 90도 꺾어 숲속 임도를 따라가야 한다..
널따란 임도를 따라가면..
인삼 재배지 옆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선다..
인삼 재배지 끝에 이정표가 나타나 편백나무쉼터 방향으로 들어선다..
참나무가 가득한 숲길을 따라 오르면..
상양마을 갈림길 십자안부에서 우측 능선을 따라간다..
부드러운 숲길 능선으로 이어지고..
봄의 향연을 만끽하며 길을 이어간다..
편백나무 숲길을 지나면..
편백나무숨터가 나타난다..
2코스가 끝나고 3코스가 시작된다..
부드러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3코스(편백나무쉼터~가람 이병기 생가터)는 장보러가는 길..
산길을 나서면 개짖는 소리가 요란한 모리아신축복기도원을 지난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서면..
수국해당화가 아름답게 핀 민가에 이른다..
둥굴레꽃도 아름답고..
하천을 따라 이어지는 길..
고목나무를 지나고..
도로를 따라 내려선다..
상양마을로 들어서는 길..
하천을 따라가면 정자쉼터..
길은 좌측으로 꺾어 돈다..
밭둑길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서는 길..
바로 아래에 원수저수지가 바라보인다..
잠시 가파르게 올라 능선에 이른다..
아직도 이병기생가까지는 2.1km..
고갯마루를 넘어 이어지는 삼남길..
삼남길은 조선시대 한양을 거쳐 충청·전라·경상도로 이어지던 옛길 가운데 하나이다..
논둑길에 세워진 둘레길 표지판을 따라 이어간다..
삼남길과 함께 이어지는 길을 따라 90도 꺾어지며 도로를 따라간다..
길은 다시 벌목지대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고..
벌목지대에 서있는 둘레길과 삼남길 표지목..
능선에 올라 좌측으로 꺾어 능선을 따라간다..
국도 1호선이 시원스럽게 지나고, 멀리 여산시가지..
데나무숲길을 지나..
널따란 임도길이 이어진다..
잠시 후 길은 우측으로 내려선다..
등산로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마을길로 이어지고..
다시 산허리를 따라가면..
건너편에 넓은 주차장이 있는 이병기생가터가 바라보인다..
새롭게 지붕을 이은 생가 건물..
아름다운 둥굴레 꽃망울..
철쭉도 아름답게 피었다..
용화산 둘레길은 3코스는 여기에서 끝이나고..
잠시 생가로 들어선다..
가람 이병기선생 생가...
근대 시조문학의 선구자이자 국어학자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선생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이병기(1891.3.5~1968.11.29)는 익산 출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가람(嘉藍)이다.
이병기(李秉岐)는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6년 시조 부흥을 위해서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또한 문헌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광복 후 한민족의 고전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전북대 문리대 학장·서울대 강사·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초>, <별>, <냉이꽃> 등이 있으며, 저서에 <국문학 개설>, <국문학 전서> 등이 있다.
1960년 학술원 공로상을 수상하였으며, 1962년 문화포장을 받았다. 전주시 다가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이병기(李秉岐)선생은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로 익산 출신이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가람(嘉藍)이다.
변호사 채의 큰아들이다.
1898년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량치챠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 · 전주제2 · 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잠시 오르면 가람 이병기의 묘소가 나타난다..
'길따라 트레킹 > 아름다운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오는 날의 수채화, 담양호 용마루길을 걷다.. (0) | 2015.05.11 |
---|---|
녹음이 짙어가는 오월의 광주 시민의(市·民·義)솟음길 (0) | 2015.05.11 |
해질녘의 목포 부흥산(復興山) 일주 둘레숲길.. (0) | 2015.04.08 |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담양 오방길 2코스 산성길... (0) | 2015.04.05 |
능선따라 유달산 한바퀴, 유달산 갓길 (0) | 2015.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