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4. 6. 19(목)
○ 기상상황 : 맑음(맑은 날씨에 종일 안개가 가득하여 시야가 흐림. 26~28℃)
○ 산행인원 : 나홀로
○ 산행코스 : 노적봉~유선각~관운각~마당바위~일등바위~이등바위~달성공원주차장~도로따라~노적봉(전남 목포)
○ 거리 및 구간별 소요시간 : 약 3.0km(GPS), 1시간50분 소요
노적봉(17:10)~대학루(17:16)~달선각(17:23)~유선각(17:28)~아기바위(17:40)~관운각(17:45)~마당바위(17:47)~
홍법대사조각상(17:55)~일등바위(18:05~10)~소요정(18:17)~이등바위(18:25~37)~달성주차장(18:50)~노적봉(19:00)
○ 주요 봉우리 : 노적봉(60m), 일등바위(228.3m)
○ 산행지 소개
유달산(儒達山 228.3m)은 기암절벽이 첩첩하여 <호남의 개골> 이라고 하며, 영달산(靈達山)이라고도 불렸다.
목포 8경 중에서도 제1경으로 꼽히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대학루, 달성각, 유선각 등의 5개의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1982년 발족된 추진위원회의 범시민적인 유달산 공원화 사업으로 작품 100점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난공원 등이 조성되어 볼거리가
많으며, 산 주변에 개통된 2.7㎞의 유달산 일주도로를 타고 달리며 목포시가와 다도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우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색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하였다.
이후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이름 붙여진 일등바위(율동바위)와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이등바위(이동바위)로
나뉘어진 유달산은 기암괴석과 병풍 절벽이 첩첩하며 옛날 봉수를 올렸던 봉수대와 달성사, 반야사 등의 전통사찰을 볼 수 있다.
영산기맥의 큰 줄기가 무안반도 남단에 이르러 마지막 용솟음을 한 유달산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영산기맥의 맨 마지막 봉우리이자
다도해로 이어지는 서남단의 땅끝인 산이다.
유달산은 옛부터 영혼이 거쳐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이라 불렸고, 도심 속에 우뚝 솟아 목포와 다도해를 한눈에 굽어보며
이곳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예혼을 일깨우고 있다..
늦은 오후 노적봉 아래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유달산보다 더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노적봉이 산 초입에 자리잡고 있다.
유달산 입구 도로 건너편에 일부러 가져다 높은 듯 서 있는 큰 바위덩어리 하나가 보이는 데 그곳이 바로 노적봉이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으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군량미를 쌓아놓은 큰 노적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를 본 왜적들은 저렇게 많은 군량을 쌓아두었으니
군사는 얼마나 많겠느냐며 지레 놀라 도망쳤다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유달산으로 오르는 긴 계단..
계단위에서 바라본 노적봉..
위 부분을 큰바위 얼굴이라 부른다...
유달산 정기.. 목포개항 110주년을 맞이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1897년 부산, 원산, 인천 다음으로 네번째 개항한 목포항을 기념하고 유달산 입구를 알리는 표지석이기도 하다..
이순신장군동상.. 이 동상은 이순신장군동상 1호로 1974년 시금성금 등 2,000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건립히였다.
충무공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4년5월20일 209명으로 이충무공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74년8월15일 세워졌다.
비명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휘호, 탁련하(卓鍊河)선생의 조각을, 이은상·최순우·최영희 선생의 사료에 의한 고증 및 심의를 거쳐,
1974년 문화공보부 등록 제1호가 되었다..
목포를 수호하듯 바라보고 있다..
정오를 알리던 포, 오포대(午砲臺)..
오포대는 유달산 입구 이순신 동상 남쪽에 있는데, 1909년 설치되었으며,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한 포대였다.
당시의 오포대는 현재 유달산공원의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오포는 주변에 모형으로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조선식 선입포로서 1667년(헌종 10년)에 제작되었고, 높이 5자, 구경 3자 5푼, 기부 8치, 주량 733근 이었다고 한다.
1회 발사시 화약 소비량 30량이었다고 한다.
1913년 8월 신식 대포로 일본 오오사까 포병공장에서 구입, 대체했고, 그 전에 있는 구식대포는 일본의 신사 경내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 오포대 담당직원이 정오에 맞춰 현재의 이충무공 동상 뒤에 있는 오포대에 올라가서 포탄 없이 포구에 화약과 신문지를 넣고
쏘아 굉음과 함께 목포 상공에 휴지가 흩어지면, 시민들은 "오포 텄다. 점심 먹자"라는 신호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말기 일본이 전쟁수행을 위한 공출로 신·구 오포를 걷어가 버렸다고 한다.
1988년 12월 다시 이를 복원, 당시 오포대에 전시하고 지방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보존하고 있다..
유달산 첫번째 정자, 대학루(待鶴樓)..
이 정자는 목포시민을 위하여 2006년5월 기업은행 목포지점에서 기증한 누각이다..
대학루에서 바라본 목포시가지와 목포항..
옹기종기 모인 유달산 기슭..
목포 구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노적봉, 시민종각, 멀리 삼학도..
어린이헌장탑..
목포의 눈물 노래비..
이 노래를 부른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씨와 작사가 문일석씨를 기념하기 위해, 1969년 예총 목포지부가 주관하여 세운 것으로
비의 높이는 211㎝, 너비는 247㎝이다.
1930년대 가수 이난영씨가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 '목포의 눈물'이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일제 탄압으로 억눌려 있던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으로 향토 신민요 노래가사를
공모했는데 목포 출신인 문일석씨의 가사가 당선되었고, 작곡가 손목인씨가 곡을 붙여 '목포의 눈물'노래가 탄생하게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음반이 출시되자마자 대히트를 기록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알려져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대표적인 목포의 노래이다..
조금 오르면 달선각(達仙閣).. 1958년 광복 13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조금 더 오르면 천자총통 발포체험장..
유달산 체험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천자통통을 발포하고 의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장소이다.
천자총통 체험은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http://www.skygun.kr/) 또는 목포시청 사이트에서 신청 가능하며,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 사이트에는 천자총통에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채험 모습을 볼 수 있다...
목포 천자통통(天字銃筒)..
가정을묘명천자총통으로 이름 그대로 중국 가정(嘉靖) 년간 을묘년(1555)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는 천자총통을 말한다.
조선 중기에는 물건을 세거나 순서를 말할 때, 천자문(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그 순서를 표기한 방법에 따라
이 총통이 조선시대 가장 큰 총통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천자총통은 최무선(崔茂宣)이 고려말에 이미 제작하였던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발전시킨 것이다.
장군화통(將軍火筒)도 이 천자총통의 전신(前身)이다..
한없이 이어지는 돌계단길..
유선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보면 왼편 여기저기에 바위들이 있는데 그 중 눈에 띄는 날렵한 바위가 투구바위이다...
투구모양 같기도 하며 코뿔소의 뿔 모양 같기도 하다. 위로 솟아 있는 장식이 없어 밋밋한 투구처럼 보이지만,
비스듬히 서 바라볼 때 투구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투구바위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설화를 지니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고하도에서 108일 간 머무르면서 목포 앞바다를 무대로 고금도 쪽으로 싸움터를 옮기기 위해 군량미를 확보해야 했다.
오가는 배를 통한 통행세를 곡물로 받아 군량미를 확보하고 목포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략상 목포를 떠나야했던 마지막 날 이순신 장군은 유달산에 올라 내려오면서 일본이 목포를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투구를
벗어 놓았는데, 그것이 지금의 투구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유선각(儒仙閣)..
유달산에 세워진 6개의 정자(대학루·달선각·유선각·관운각·소요정·팔각정) 중 하나로 유달산 중턱에 있다.
목포의 최고 전망대로 알려진 정자로, 이곳에 서면 목포항과 목포시가지, 삼학도, 영산호, 다도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다가 태풍으로 인해 무너져 중건하였고, 중건한 건물도 퇴락하자
1973년8월1일 옛 모습 그대로 개축하였는데 원래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현 건물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갖춘 누각이다.
한말 유학자로 시문에 능했던 무정 정만조(鄭萬朝)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유달산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시를 읊었던 곳이라하여
유선각(儒仙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누각 전면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해공 신익희(申翼熙)가 유달산에 들렀다가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유선각 앞쪽 암반에는 1973년 개축 때 세운 유선각 표비가 있다..
달성사 갈림길인 바람골쉼터를 지난다..
바위틈을 지나 가파르게 오르면..
일등봉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 고래바위 옆을 지난다..
계단을 오르면서 쳐다보면 거대한 고래가 입을 벌리고있는 고래처럼 생겼다하여 고래바위라 하며 일명 '두꺼비 바위'라고도 부른다.
고래의 입 모양처럼 생긴 부분이 등산로 계단 부위에 돌출되어 있어 사람들은 의례 고래 입주둥이 부분을 한번씩 만져보면서 오른다..
관운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르면 하늘로 치솟아있는 입석바위 바로 위편에 종 모양의 바위가 있다.
절에서 흔히 볼수있는 범종과 다른 서양식 종으로 아래쪽에서 볼때 확연히 종 모양임을 알수있다..
종바위에 올라 바라본 목포시가지..
목포항, 그 건너의 대불부두..
목포항 국제여객터미널과 쾌속선..
우측 바위틈으로 내려다본 달성사..
달성사는 유달산의 동남방, 죽교동 317번지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대둔사의 말사다.
절은 이전에 대원사(大願寺)라 불렸다고도 전해지며 절의 창건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창건설 및 1913년 창건설 등이 있는데,
1913년 4월 초파일 대둔사에 있던 노대련(盧大連)선사가 이곳에 와서 창건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달성사는 전통사찰 69호이며, 문화재(유형문화재 228호, 229호)를 보유하고 있는 목포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잠시 오르면 전망데크.. 이름하여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란다..
전망데크에서 바라본 이등바위..
일등바위까지는 330m남았다..
유달산에서 만난 꽃망울..
유달산은 사방이 조망터이다..
관운각 맞은편에 있는 ‘애기바위’는 두엄씨바위(큰 엄씨 · 작은 엄씨 바위)라고도 한다.
높이 솟아 있는 두 개의 바위 주변에는 여러 개의 바위들이 널려 있으며 조금 아래의 남쪽에는 몇 개의 벤치가 있다.
큰 엄씨가 애기를 업고 작은 엄씨에게 등을 돌리고, 작은 엄씨도 애기를 업었는데 큰 엄씨를 보려고 하는 형상이다.
이곳은 마당바위로 오르는 능선이 남동쪽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어 두 엄씨는 거센 바다 바람을 등지고 애처롭게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내려다보면 제 모습을 볼 수 있다..
애기바위 뒤편 아래쪽에 있는 조대바위...
고하도 앞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팔짱을 끼고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낚시꾼을 보는 듯하다.
등뒤의 큰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모양인데 네 개의 바위가 합쳐져 이러한 모양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서는 다도해의 잔잔한 바다와 길게 늘어진 고하도, 옹기종기 모여있는 온금동 마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으며,
안개 자욱한 날에 바라보면 더 이채롭다..
곳곳이 아름다운 전망대이다..
관운각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고개를 내밀고 엎드려 있는 거북이와 닮았다.
관운각을 지나 바다로 다시 돌아가려는 거북이의 모습인데 여기 이외에도 유달산에는 거북형상을 한 바위들이 많다...
나막신바위는 관운각 아래 마당바위로 가는 길과 곧장 일등봉으로 가는 갈림길의 아래 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갈림길에서 보이는 부분이 나막신의 앞부분으로 둔탁한 직사각형의 바위인데도 앞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 나막신을 연상시킨다..
입석바위는 관운각에서 바당바위로 오르는 길에 있는 바위로 크고 작은 장방형의 네모 반듯한 두 개의 바위다.
일등봉의 능선에 걸쳐있는 이 바위는 바위능선의 지질변화 과정 중 수직으로 절리되어 기둥처럼 우뚝 서 있게 된 것이다.
정면에서는 사각기둥 모양의 평범한 입석으로 보이지만 옆면이 길에 뻗어있어 상당한 규모임을 자랑하고있으며,
이곳이 유달산 상봉으로 가는 길목임을 상징하는듯하다..
관운각(觀雲閣)은 마당바위 아래에 있는 누각으로 유달산의 누정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또한 목포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위 마당바위.. 널따란 바위공간이다..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손가락바위...
마당바위에 올라서면 기괴한 손가락바위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목포의 어느지역에서나 보이는 것으로 유달산의 상징적인 바위라 할 수 있는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양새가 서로 상이하다.
뭔가 약속하자는듯 새끼손가락을 내세우는것 같기도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내가 최고라고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한다.
하늘을 향해 치켜세운 손가락이 하나 보이는데, 이 바위가 워낙 반듯하여 전문가라도 장비 없이는 오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손가락바위를 아무런 기구 없이 마치 서커스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오르내린 기인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를 ‘유달산 타잔’이라
불렀는데 그가 바로 해방 직후에 살았다는 정인조이다.
그가 손가락바위를 타는 일요일이 되면 바위 타는 걸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바위를 타는 신기를 타고 난 그도 결국 산에서 떨어져 최후를 맞이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고하도와 목포대교.. 그 너머의 신안군 섬들은 운무에 잠겨 보이질 않는다..
목포 구도심과 삼학도..
목포항과 대불항, 그리고 영암땅도 희미하다..
바로 아래에 일본불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마당바위에서 내려섰다가 일등바위로 가는 길에 좌측 숲으로 들어 확인해 보았다.. 일본불교의 흔적들..
일본의 잔재라고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인 만큼 보전하여야 할 가치는 있다고 본다.. 망가뜨릴 필요까지야..
1920년대 말 일본인들이 일본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목포 유달산에 88개의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을 만들었는데,
현재 유달산 일등바위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암각상들만 남아 있다고 한다...
부동명왕(不動明王)은 불교 진언종에서 받드는 오대존명왕의 하나로 부동여래사자(不動如來使者)라고도 한다.
오대존명왕은 곧 중앙의 부동, 동방의 항남세, 남방의 군다리, 서방의 대위덕, 북방의 금강야차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부동명왕은 중앙에 있으며 대일여래가 일체의 악마를 항복시키려고 변화하여 분노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원명은 아시알라라 하는데, 힌두교 시바신의 이명을 불교가 그대로 채택한 것으로 불교에서는 이 명왕에게 사자의 성격을 부여하였다.
후에는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사자로써 번뇌의 악마를 응징하고 밀교 수행자들을 보호하는 왕으로 간주되었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왼손에는 삭(索)을 쥐었으며, 부릅뜬 눈과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분노신(忿恕身)을 하고 있다.
맹염(猛炎)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악마를 박멸하는 위력을 나타낸 것이고, 동자형(童子形)의 몸 모양은 여래의 동복(童僕)이 되어
밀교 수행자들의 봉사자가 되려는 서원(誓願)에 따른 것이다.
조상(造像)은 히말라야 산록을 뛰어다니는 목동을 모델로 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인도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 명왕부(明王部)의 대표격으로서 7세기 후반 <大日經>이 성립되자 밀교 오대명왕의 주존(主尊)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일제시대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 사이에는 유달산신사라는 글씨를 새겨 놓았는데, 지금은 '사'는 지워지고, '유달산신'만 남아있다.